아프리카수면병 약, 1형 당뇨병에 효과…또 '약물의 재발견'

미국 인디애나대

당뇨병 환자가 인슐린 주사제를 투여하고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90년대 아프리카 수면병 치료제로 개발됐던 약에서 제1형 당뇨병 치료효과가 새롭게 확인됐다. 원래 개발 목적과 다른 질병에 대해 새로운 효과가 확인된 '약물 재창출' 사례라는 평가다. 

라규 머미라 미국 인디애나대 의대 교수 연구팀은 '디플루오로메틸오르니틴(DFMO)'이란 약물이 제1형 당뇨병 환자의 인슐린 생산세포를 보호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1일(현지시간) 국제학술지 '셀 리포츠 메디신'에 발표했다. 

제1형 당뇨병은 체내에서 인슐린이 거의 생산되지 않는 자가면역질환이다. 인슐린 생성과 자가면역반응에 관여하는 베타세포의 손상이 원인이다. 주로 소아에게 발생하며 환자는 평생 인슐린 주사를 맞아야 한다. 

DFMO는 1990년 아프리카 수면병 치료에 대한 주사제로 미국식품의약국(FDA)의 승인을 받았다. 2020년에는 특정한 신경 조직에서 형성되는 암인 신경아세포종에 대해 치료 효과가 확인됐다. 

연구팀은 DFMO가 세포의 대사작용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제브라피쉬와 생쥐를 사용한 실험을 실시한 결과 DFMO가 베타세포를 환경적인 요인으로부터 보호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인체 내에서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는 세포를 보존하고 심지어 회복시킬 수 있는 가능성까지 확인했다고 연구팀은 설명했다.

승인된 약물에서 원래의 개발 목적과 다른 효과가 발견된 사례는 여럿 있다. 영국 제약사 아스트라제네카(AZ)의 비소세포폐암치료제 '이레사'는 처음 서구권 국가에서 실시된 임상시험에서 간질 등의 부작용이 발생했다. 하지만 이후 일본에서 이뤄진 임상시험에서 부작용 없이 높은 치료효과를 보이며 동양인 폐암 치료제로 각광받게 됐다.

전문가들은 기존에 개발된 많은 약물 중에선 이처럼 미처 발견되지 않은 효과를 품고 있는 사례가 많을 것이라 말했다.

이현숙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는 "이레사는 동양인에게서 많이 발생하는 상피세포성장인자수용체(EGFR) 돌연변이 유전자에 효과를 갖고 있었는데 처음에는 이같은 사실이 알려지지 않아 사장될 뻔 했다"고 설명했다.

학계에 따르면 현재 승인된 약물 중 70~80%는 사실상 '잠들어' 있다.  이 교수는 "기존에 활발히 사용되지 않은 약물의 발견되지 않았던 효과를 확인하는 것은 학계의 과제 중 하나"라고 말했다. 인공지능(AI)을 활용해 약물 효과를 예측하는 모델을 개발하는 것은 '잠자는 약물'의 감춰진 효과를 확인하는 한 방법이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박정연 기자 hess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