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 꿈 접고 ‘이승만 양자’ 운명 선택... 평생 부친 선양 힘쓴 이인수 박사

유석재 기자 2023. 11. 2. 17:3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1일 별세한 이인수 박사
이승만 전 대통령의 양아들 이인수 박사가 1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2세. 사진은 2일 오후 서울 마포구 연세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이 박사의 빈소./연합뉴스

“양자(養子)로 들어가 주세요!” 1961년, 보성고와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 다니던 서른 살 청년 이인수에게 뜻밖의 제의가 들어왔다. 한 해 전 4·19로 하야한 뒤 미국 하와이로 간 이승만(1875~1965) 전 대통령의 양자가 되라는 전주 이씨 문중의 결정이었다. 지난 1일 별세한 이인수(92) 박사는 이렇게 이승만 전 대통령의 대(代)를 잇게 됐다.

이 전 대통령은 당초 이기붕 전 국회의장의 아들 이강석을 양자로 받아들였지만 4·19 직후 그 일가족이 동반 자살하는 비극이 일어났다. 하와이로 간 뒤 조상을 모실 아들이 없음을 한탄했다는 것이다.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이순영씨가 ‘이씨 종중에서 양자를 천거해 달라’고 했다. 조건은 ‘대학을 졸업한 사람, 영어를 할 줄 알고, 미혼이며, 좋은 집안이어야 한다’는 것. 이인수는 이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데다 양녕대군 17대손이어서 16대손인 이 전 대통령과 계대도 맞았다.

너무나 막중한 책임이라며 사양하는 이인수에게 이순영은 이렇게 설득했다. “문중에서 그동안 잘 모셨더라면 어른의 말년이 이렇게 비참하지 않았을 게 아닌가! 마지막으로 같은 혈손이 도와드릴 의무가 있다.” 이인수는 독일 유학의 꿈을 접고 이 운명을 받아들였다.

그가 하와이에 도착하자 이 전 대통령은 손을 잡고 등을 어루만지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좋아했다고 한다. 1965년까지 모두 세 차례 하와이에 머문 이인수는 이 전 대통령 부부가 작은 목조 주택에서 화초를 키우며 살다 귀국이 좌절돼 요양병원으로 들어가는 것을 지켜봤고, 이 전 대통령의 임종을 지켜본 뒤 유골함을 들고 입국해 국립묘지 안장을 위해 힘썼다.

1961년 12월 13일 이승만(오른쪽) 전 대통령과 프란체스카(왼쪽) 여사 부부가 미국 하와이에서 새로 양자로 맞은 이인수를 만나 기뻐하고 있다.

미국 뉴욕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단국대와 명지대에서 교수 생활을 했다. 그러면서 이 전 대통령의 공과(功過)를 제대로 평가받도록 하는 데 일생을 바쳤다. 연구서 ‘대한민국의 건국’과 논문 ‘대한민국 건국의 정통화 과정에 대한 연구’ 등을 썼다. 부친이 거주했던 서울 이화장의 보존을 위해 노력했으나 정부로부터 좀처럼 재정 지원을 받지 못해 어려움을 겪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만들어 낸 소중한 자유민주주의 체제 속에서 살면서도, 오히려 건국 대통령을 폄훼하는 세태를 이인수 박사는 안타까워했다. “그분의 공적(功績)이 무엇이냐고? 독립운동에 몸을 바쳤고, 광복 이후 자유민주주의 노선을 선택했다. 60만 국군을 양성했으며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에 성공했다. 모두 다 열거하려면 지면이 모자랄 것이다.” 2006년 KBS 드라마 ‘서울 1945′가 고인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고소하는 등 고소·고발도 여러 건 진행했다. ‘대통령 양자로서 볕은 못 쫴 보고 음지에서 짐만 걸머졌던 인생’이라는 평가도 받았다.

이승만 전 대통령에 대한 재평가 움직임이 곳곳에서 일어난 올해 5월, 이인수 박사는 이승만 기념관의 공동 추진위원장에 추대됐다. 지난 9월에는 4·19가 일어난 지 63년 만에 4·19 민주묘지를 찾아 희생자와 유가족에게 사과를 전했다. 평소 “선친께선 불의에 항거한 학생들에게 장하다고 했다”고 말했던 그는 “오늘 참배와 사과에 대해 선친도 ‘참 잘했다’고 기뻐하실 것”이라고 했다. 별세하기 두 달 전의 일이었다.

2일 이인수 박사의 빈소가 차려진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는 추모 행렬이 이어졌다.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은 “이 박사께서 4·19 묘역에 참배하면서 이전에 화해하지 못했던 것을 이뤄 편하게 가셨다고 들었다”고 했다.

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 회장인 황교안 전 국무총리는 “얼마 전 4·19 단체와 화해를 이뤘다는 소식을 듣고 ‘큰 숙제를 푸셨다’고 생각했다”며 “평생 이 전 대통령을 지키면서 애쓰고 수고하셨던 고인의 노고를 기억하며 영면을 기원하겠다”고 했다. 이종찬 광복회장은 “이승만 기념관 사업이 끝나는 모습을 보셨어야 하는데 아쉬움이 남는다”고 했다. 최재형 국민의힘 의원은 “대한민국 독립과 건국 대통령 이승만의 공적이 바로잡혀 가는 상황을 보고 가셨기 때문에 편히 가셨을 것”이라고 했다. 이 전 대통령이 설립한 인하대 1회 입학생이자 대학 부총장을 지낸 남종우(90)씨도 이날 이 박사의 빈소를 찾았다.

이 박사의 장남인 이병구(54)씨는 “아버님께서는 ‘이 전 대통령 양자로 온 건 아주 잘한 일이었고,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노력하신 분을 끝까지 지킬 수 있어서 행복했다’고 하셨다”고 했다. 이날 고인의 빈소에는 이승만 전 대통령 관련 단체뿐 아니라 4·19 민주혁명회장과 4·19 혁명공법단체 총연합회가 보낸 화환도 놓였다. 이인수 박사의 발인은 4일 오전 6시 30분 예정이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