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의 창] 겨울에 가득차야 하는 것

2023. 11. 2.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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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적 귀뚜라미떼 겁냈지만
진짜 무서운 건 텅 빈 연탄광
연탄후원 작년보다 30% 줄며
취약계층 겨울나기 어려워져
마음의 문 열고 온기로 채워야

완연한 가을이다. 아침저녁으론 쌀쌀한 바람이 불지만, 높고 푸른 가을 하늘은 가만히 바라보기만 해도 답답한 가슴을 시원하게 해준다. 단풍을 보러 산으로 떠나는 행락객의 발걸음은 가볍고, 교외에서 황금빛 들판을 목격한 도시인의 마음은 포근해진다. 가을은 여행과 산책을 즐기기에 분명히 좋은 계절이다. 하지만 누군가에겐 다가올 겨울을 떠올리며 피어오르는 근심을 막을 길이 없는 날들이기도 하다. 모든 것은 으레 양면성이 있다지만, 계절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마음의 여유가 나뉘는 계절이 봄과 가을일 것이다. 봄엔 다가올 여름의 폭염 때문에, 가을엔 곧 들이닥칠 겨울의 한파 때문에 누군가의 마음에 그늘이 드리워진다.

경기 불황으로 연탄 후원이 크게 줄었다고 한다. 작년에 비해 30%나 감소했다고 하니 불황으로 인해 저소득층이 심각한 타격을 받기 시작했다는 걸 알 수 있다. 기업 후원이 줄었다는 기사도 심심찮게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청명한 가을 하늘을 만끽하는 동안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이들에겐 겨울이 들이닥치고 있는 것이다. 아직도 연탄을 때는 집이 있느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전국을 기준으로 7만가구가 연탄 난방을 하고, 서울은 오히려 연탄 사용 가구가 증가했다고 한다. 동절기엔 하루에 약 일곱 장씩 한 달에 최소 200장의 연탄이 필요하다. 연탄 한 장의 가격은 850원. 난방비를 계산해보니 부담이 될 만한 금액이다. 그러나 주거 여건상 가스보일러를 설치할 수 없는 집에 살고 있거나, 고장으로 인한 수리비를 마련할 수 없는 이들은 연탄 난방을 피할 길이 없다.

어릴 때 나는 연탄아궁이가 있는 집에서 살았다. 겨울이 되면 엄마는 연탄을 가느라 분주했고, 연탄광에 쌓여 있는 연탄을 자주 세어보곤 했다. 나는 연탄광을 무서워했다. 귀뚜라미 떼가 사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광 안으로 들어가는 건 물론이거니와 문을 열어놓는 것조차 두려워했다.

어느 날 밖에서 실컷 놀고 돌아와 보니 연탄광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어느 때고 귀뚜라미가 튀어나와 나를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이 밀려왔다. 얼른 문을 닫아야 했다. 잔뜩 긴장한 상태로 걸어가 문 앞에 도착하자 광 안에서 뛰어다니고 있는 귀뚜라미가 보였다. 뜻밖에도 귀뚜라미보다 텅 비어 있는 광이 더 큰 공포로 다가왔다. 바닥이 드러날 정도로 비어 있는 연탄광은 나를 즉시 불안에 빠트렸다. '왜 연탄이 하나도 없지?' 어린 나이임에도 심각한 위기 상황임을 인지했다. 더 이상 귀뚜라미는 무섭지 않았다. 나는 연탄광 문을 닫지 않고 활짝 열어두었다. 누군가 나타나 연탄을 채워주길 바라면서.

연탄 후원이 급격히 감소했다는 기사를 읽고 어릴 때 목격했던 텅 빈 연탄광이 떠올랐다. 그날 연탄이 배달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귀뚜라미보다 더욱 무서운 것은 알고 보니 비어 있는 연탄광이더라는 깨달음만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기후 변화와 경기 불황으로 에너지 취약 계층에게 여름과 겨울은 점점 더 고통스러운 계절이 되어 가고 있다. 올해 연탄 후원이 급감한 것은 경기 불황이 더욱 깊어졌다는 신호일 것이다.

나누려는 마음이 얼어붙은 게 아니라 나눌 수 있는 곳간이 내가 어릴 때 목격했던 연탄광처럼 비어 있는 상황일 것이다. 그러나 문을 굳게 닫아둔다고 해서 상황이 나아지는 건 아니다. 새로운 연탄을 들여보내기 위해서도, 이웃에게 빌려준 연탄을 잊고 살다가 뜻밖의 날에 커다란 온기와 함께 돌려받기 위해서도 문은 활짝 열려야 한다. 어둡고 텅 빈 광에선 쓸쓸한 귀뚜라미 소리만 길게 울려 퍼질 수밖에 없다.

[이서수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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