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없다고 소통 없나요”···무인 점포에서 마음 주고받는 사람들

정효진·김세훈 기자 2023. 11. 2.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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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서울 동대문구에 위치한 무인 코인빨래방에서 한 이용자가 빨래 건조를 기다리며 공책의 글을 읽고 있다. 정효진 기자

지난 1일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에 위치한 한 무인 코인빨래방. 책상 위에 공책 세 권이 놓여있다. 이용자들이 각자 하고 싶은 말을 남기는 공책이다. 50쪽 분량 공책 2권은 이미 사람들의 손때로 꼬깃꼬깃해졌다. 뻣뻣한 질감이 남아있는 한 권은 채워지고 있다. 공책은 서로 다른 글씨체로 적힌 형형색색의 말들로 빼곡하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고백했다가 대차게 차였다. 마음이 아프네요’라고 누군가 속상함을 토로하자 ‘지금 당장은 마음 아프겠지만 훌훌 털고 일어나실 거예요!’라는 위로가 이어졌다.

한 이용자는 ‘모달 이불은 잘 안 마른다는 생활 꿀팁부터 사람들의 행복한 순간이나 고민까지 공책을 통해 읽을 수 있어 위로를 받았다’고 노트 감상평을 남겼다. ‘인생이란 뭘까?’하는 질문에 ‘나도 궁금하다’는 반응이 오가고, 릴레이로 고양이 그림을 그리자는 제안 아래로 각기다른 고양이 4마리가 나타났다.

서울 곳곳 늘어나는 ‘무인 점포’가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시민들의 ‘비대면 사랑방’ 역할을 하고 있다. 소소한 생활 꿀팁부터 진지한 조언, 인생 위로까지 대화 주제도 폭 넓다. 이용자들은 ‘신선하다’ ‘마음이 따뜻해진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지난해 한국에 유학온 사사야마 리오씨(24)도 이곳에 글을 남긴 적이 있다. 그는 ‘이것을 본 당신은 그냥 기분이 좋아진다’는 글과 함께 그려진 캐릭터 밑에 ‘그림이 귀엽다’는 댓글을 달았다. 리오씨는 “마트도 다 무인으로 바뀌어서 사소한 말 한마디라도 하고 싶은 유학생으로서 아쉬웠다”며 “코인 빨래방에는 사람이 없을 거로 생각하고 왔는데 공책이 있어서 반가웠다”고 했다. 성북구의 한 무인카페에서 메모를 남긴 경험이 있는 최은영씨(19)는 “특별히 힘든 날이 아니었는데 따뜻한 말을 보니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져서 한마디 거들었다”고 했다.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 무인 코인빨래방에 놓인 공책에 이용자가 쓴 글이 남겨져 있다. 정효진 기자

관악구·노원구·성북구 등 서울 다른 지역의 무인점포에서도 ‘비대면 대화’가 오간다. 슬픔과 희망이 있고, 위로와 공감이 있다. 관악구의 한 빨래방에는 ‘열심히 살아보려 상경한 지 한 달이 다 됐습니다. 이곳에서 하루를 끝내는 것에 만족하며 지내요. 아쉬운 것은 아쉬운 대로, 슬픈 것은 슬픈 대로 세탁하듯 씻어냅시다’라는 메모가 적혀 있다. 다른 이용객이 ‘위로받고 가요. 감사합니다’라는 댓글을 남겼다.

성북구의 한 무인카페에 붙여진 ‘결혼한다’는 메모에는 ‘행복하세요’, ‘부럽다’라는 축하글이 달렸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잘 대화하는 법 아시는 분’을 찾자 ‘눈이 이쁘다든지 장점을 찾아서 칭찬해주면서 대화의 물꼬를 터는 편’이라는 답변이 달렸다. “이 빨래방 노트 속에 모든 게 들어있어요” 한 이용자는 이렇게 적었다.

업주들은 손님과 만나지 못하는 무인점포의 특성을 보완하기 위해 공책이나 포스트잇 등을 사용한다고 했다. 성북구에서 코인빨래방을 운영하는 한모씨(61)는 “건의사항이 적히는 경우 그걸 보고 고칠 수 있고 이렇게라도 소통하자는 의미”라고 말했다. 성북구의 또 다른 코인빨래방 공책 맨 앞장에는 ‘고객님들과의 소통을 위해 노트를 만들었다. 자유롭게 활용해달라’고 적혀 있다.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 한 무인 코인빨래방에 이용자들이 글을 남기는 공책이 놓여있다. 정효진 기자

메모를 보는 이용객들 반응은 긍정적이다. 현모씨(25)는 “동네 무인 아이스크림 가게에 붙어있는 딸기맛 아이스크림을 넣어 달라는 아이의 메모가 귀여웠다”며 “혼자 살아서 동네에 대해 잘 모르는데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라는 실감이 났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1인 가구·비대면 활동의 증가로 ‘무인 소통’이 활성화됐다고 분석했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이전에도 대학가 막걸리집 벽에 댓글을 남기는 경우가 있었다. 비대면 시스템은 효율성과 편리성을 갖지만 타자와 교류하고 싶은 기본 욕구를 충족시킬 수는 없다”며 “비대면이 일상화되며 무인점포로 공간이 달라진 것뿐 타자에 대한 그리움을 느끼고 관계를 지향하는 인간의 본성은 같다. 공책 소통은 그런 본능을 해소하려는 시도”라고 했다.

물리적 공간의 중요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도 있다. 김은태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토론이나 논쟁까지 하는 공론장은 아니지만 지역사회에 같이 사는 이웃들끼리 감정을 교류할 수 있는 매체가 된다”라면서도 “(이렇게 소통하는 것이) 장기적인 관계는 아니라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사람들이 직접 만날 수 있는 물리적인 공간 역시 필요하다”고 했다.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 한 무인 코인빨래방에 이용자들이 글을 남기는 공책이 놓여있다. 정효진 기자

정효진 기자 hoho@kyunghyang.com, 김세훈 기자 ksh3712@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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