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시론]디지털 유산, 더 나은 가치로 향유돼야
디지털 전환이 가속화하면서 가상화폐, 대체불가토큰(NFT), 소셜네트워크(SNS)의 다양한 게시글이나 사진·영상, 온라인의 예술 활동 결과물 등 수많은 종류의 재산적 가치가 있는 데이터가 증가하고 있다. 사람이 생존하는 동안에는 디지털 재산에 대한 통제권을 통해 보유·사용·수익·처분 등 재산적 가치를 향유하거나 실현할 수 있다. 사람이 사망한 후에 그러한 수많은 디지털 재산은 어떻게 될까. 누구도 통제하지 않는 디지털 자산은 잊힌 보물이 될 수도, 버려진 쓰레기가 될 수도 있다. 디지털 시대로 전환되면서 사망한 후 망자가 남긴 디지털 재산을 규율하기 위한 논의가 시작된 지도 어느덧 10여년이 흘렀다. 그러나 반짝 이슈로 그치고 구체적 규율방안에 대한 심도있는 논의나 사회적 합의로까지 이어지지는 못하고 있다.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가 세상의 주역이 되고 모든 것이 디지털화되는 세상으로 접어들게 되면 디지털 형태의 재산을 사람이 생존한 동안뿐만 아니라 사후에도 적절하게 처리함으로써 생전의 본인의 의사가 사후에도 실현되도록 하거나 상속인을 포함한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디지털 유산으로부터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가치를 향유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제도적 기반은 필수불가결하다. 디지털 유산이 디지털 쓰레기가 되지 않도록 합리적 처리방안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기 위한 논의를 본격화할 때다.
디지털 유산에 대한 논의를 본격화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디지털 유산이 무엇인지에 대한 공통의 이해가 선행돼야 한다. 논의의 대상에 대한 합의가 없으면 각기 다른 방향으로 논의가 전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럼, 디지털 유산이란 법적으로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현행법 상 디지털 유산에 대한 정의는 없다. 그러나 기존 상속법 체계로부터 디지털 유산을 정의해본다면, 디지털 유산(Digital inheritance or Digital estate)이란 '사망 시 보유하고 있던 모든 디지털 형태의 재산에 관한 권리·의무' 정도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정의한다면 실제 디지털 유산이 될 수 있는 것은 매우 다양하다. 즉, 인터넷에 저장되어 있는 개인에 관한 정보, 이용자 제작 콘텐츠, 디지털 형태의 음악이나 동영상 등 저작물, 디지털 상표, 디지털 디자인, 온라인 홈페이지, 블로그, 미니홈피, 온라인 카페, 소셜네트워크서비스, 인터넷의 각종 게시물이나 댓글, 도메인이름, 계정, 아이템, 아바타, 게임머니나 블록체인 기반의 가상화폐, NFT 등과 같이 사람이 디지털 형태로 보유할 수 있는 재산적 가치가 있는 모든 것들이 디지털 유산에 포함될 수 있다. 또한 기술의 발전이나 서비스의 다양화에 따라 새로운 유형의 디지털 유산이 얼마든지 출현할 수 있다.
디지털 유산은 디지털 데이터 형태로 존재하며, 다양한 법적 성질을 지닌 정보가 포함되어 있으며, 그러한 정보의 통제·관리에 관여하는 디지털 서비스 제공자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는 특징이 있다. 또한 디지털 유산의 법적 처리는 대부분 그에 대한 통제권 또는 접근권한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따라서 이러한 특징들을 충분히 고려, 디지털 유산 제도를 설계해야 한다.
현행법에는 디지털 유산의 처리에 대해 아무런 법적 근거도 없는 것일까. 디지털 유산 제도를 설계하는 과정에서 현행법으로 해결할 수 있는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을 정확하게 짚어내야 기존 법·제도와 충돌없이 오프라인 규율체계와 조화되는 디지털 유산에 관한 제도를 새롭게 설계해나갈 수 있다. 현행법상 사망자의 유산을 일정한 범위의 자에게 승계시키는 제도로, 민법상 상속제도가 있다. 상속을 통해 구체적 재산의 형태를 묻지 않고 일반적·포괄적으로 사망자인 피상속인의 사망 시에 속해있던 모든 권리와 의무를 상속인에게 승계시킨다. 디지털 유산의 경우에도 특별법에 의해 그 승계가 특별히 인정되거나 부인되지 않는 한 민법상 상속제도에 의해 일반적·포괄적으로 승계된다.
민법에 의하더라도 망자의 모든 디지털 유산이 예외없이 승계되는 것은 아니다. 법적 평가에 의해 실제 승계되지 않는 재산도 있다. 예를 들면, 민법 제1005조 단서에 의해 피상속인의 일신에 전속한 디지털 형태의 재산은 상속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민법상 상속제도에 의해 승계가 인정되는 것들은 법적 처리를 하면 되고, 그렇지 않은 것들 중에서 일정한 법적 규율이 필요한 것에 대해서는 특별법에 존재하는 규정을 적용 또는 유추적용하거나 그것이 어렵다면 새로운 입법을 모색해야 한다. 이러한 순차적 검토를 위해 먼저 현행 상속법의 규정을 보면, 디지털 유산도 기본적으로 민법 제1005조에 따라 상속인에승계가 가능하다. 국내 대형 플랫폼 사업자 중에는 디지털 유산 관련 정책을 명시적으로 밝힌 경우도 있지만 구체적 처리 방안에 대해서는 규정하지 않는 경우도 있고, 상속인에게 원칙적으로 접속권을 부여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디지털 서비스 제공자가 계정이나 블로그 등과 같은 디지털 유산의 승계를 허용할지에 대해 상이한 입장을 가지는 것은 상속을 규율하는 민법의 해석을 바탕으로 한 명확한 법적 근거가 제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작인격권이나 인격적 속성이 강한 디지털 정보처럼 일신전속적 성격을 가지는 디지털 유산이 존재할 수 있다는 점도 유의해야 한다. 일반론적 관점에서 다양한 유형의 디지털 유산을 각각 구분해 개별적으로 상속을 인정하는 데 특별한 문제가 없다고 하더라도, 많은 경우에는 하나의 계정이나 식별자를 중심으로 다양한 성격의 디지털 재산이 서로 결합·혼재돼 존재하기 때문에 각각의 재산을 구분해 상속인에게 승계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점이 문제다. 무엇보다 상속가능한 디지털 정보와 상속이 허용되지 않는 일신전속적 성격의 디지털 정보가 혼재된 경우에 무수히 많은 사망자의 디지털 유산 중에서 각각을 선별해 승계를 허용하는 것은 많은 경우에 불가능에 가깝고, 기술적으로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그에 필요한 비용이 적지 않다는 문제가 있다.
따라서 입법적으로 이를 보충해 상속가능한 디지털 유산을 비교적 용이하게 구별할 수 있는 절차나 기술적 방법을 개발하거나 사전에 사망자의 의사를 명확히 밝히도록 해 그에 따른 처리를 유도·촉진하는 제도를 법적으로 도입하는 방안 등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디지털 유산을 처리해주는 소위 '디지털 장의사'도 있지만, 주로 디지털 유산의 삭제와 같은 잊힐 권리를 실현해주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디지털 유산의 처리를 입법적으로 해결하려는 시도는 제18대 국회에서 처음 시작된 이후 제21대 국회에 이르기까지 지속됐다. 제18대 국회에서는 유기준 의원 대표발의안(2010.7.12. 의안번호 1808831), 박대해 의원 대표발의안(2010.7.21. 의안번호 1808895), 김금래 의원 대표발의안(2010.9.9. 의안번호 1809300)이, 제19대 국회에서는 김장실 의원 대표발의안(2013.5.22. 의안번호 1905056)이 제안되었다. 김장실 의원 대표발의안에 따르면 이용자가 생전에 획득한 게임아이템, 작성한 게시물, 관리한 미니홈피·블로그 등을 디지털유산이라 하고 그 소유 및 관리권한의 승계에 관한 규정과 제3자의 이의제기 규정을 마련했으며(안 제44조의11제1항), 이용자가 사망하기 전에 디지털유산의 처리방법을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미리 지정한 경우 정보통신서비스제공자는 이용자가 지정한 처리방법에 따라 디지털유산을 처리하도록 했다(안 제44조의11제2항).
또한 디지털유산의 승계에 관하여 본조에 규정되지 않은 사항은 민법 상속에 관한 규정을 준용하도록 했다(안 제44조의11제3항). 제21대 국회의 경우에도 황보승희 의원 대표발의안(2022.7.11. 발의 의안번호 2116397)은 이용자가 사망하거나 실종선고를 받은 경우 민법에 따른 상속인이 디지털유산의 관리권한을 승계할 수 있도록 근거를 규정했고, 허은아 의원 대표발의안(2023.4.25. 의안번호 2121642)은 정보통신서비스 제공자로 하여금 이용자가 이용약관으로 정하는 기간 동안 자신의 계정에 접속하지 않거나 이용자의 사망 또는 실종 등의 사유로 정보통신서비스를 이용하지 않는 것이 인정되는 경우에는 해당 계정을 휴면계정으로 설정하고 해당 이용자의 디지털유산을 이용자가 사전에 정한 방식으로 처리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다양한 입법시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국내에서 디지털 유산에 대한 입법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반면, 미국의 경우에는 '수탁자 디지털 자산 접근에 관한 개정 통일법(RUFADAA)'에서 온라인 계정 이용자가 유언장이나 온라인 도구를 통해 동의한 경우에는 그의 유산관리자나 수탁자가 해당 전자통신에 접근할 권리를 가지는 것으로 규정했고, 47개 주가 RUFADAA를 입법했다.
기존 국회의 입법 노력과 함께 국내외의 실무나 입법 사례 등을 면밀히 검토하고, 다양한 이해관계자가 참여하는 열린 논의를 통해 민법상의 상속 제도의 근간을 유지하면서도 디지털 유산에 관한 상속권을 현실적·합법적으로 행사할 수 있도록 절차를 보강하는 방향으로 입법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무엇보다 디지털 유산에 관한 사망자의 의사를 생전에 명확히 하도록 하여 사망 확인 시에 그에 따라 처리되도록 제도적으로 뒷받침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상속인이나 정당한 권리자가 디지털 유산을 처리할 수 있도록 첨단 기술을 이용, 기술적 중립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기술의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신뢰성 있는 절차·체계를 개발해야 한다.
디지털 유산은 현행법에 의해 명확하게 규율되지 못하는 한계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디지털 전환 가속화에 따라 디지털 유산은 계속 증가하고 있으며, 그 사회·경제·문화적 가치도 증대되고 있다. 따라서 디지털 유산이 디지털 쓰레기로 방치되는 것을 방지하고, 디지털 유산이 미래 세대를 통해 더 나은 가치로 향유될 수 있도록 더 늦기 전에 구체적·실천적 해결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최경진 가천대 법학과 교수 kjchoi@gachon.ac.kr
〈필자〉가천대 인공지능(AI)·빅데이터정책연구센터장이다. 데이터·정보통신기술(ICT)·개인정보보호 법 연구자로 관련 법·정책 전문가다. 현재 한국인공지능법학회장, 한국정보법학회 수석부회장, UN 국제상거래법위원회 정부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개인정보보호법학회장도 역임했다. 데이터와 ICT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바탕으로 법·제도 개선과 정책 추진에 기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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