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은퇴한 무사 출신 인문주의자의 낙원”
[서울&] [교토, 걸으며 생각하며]
한시의 대가가 말년을 보낸 ‘은거’
중국 시인 36명을 기려 ‘시선당’ 명명
당대 학자·예술인의 문화사랑방 노릇
영국 찰스 왕세자 부부도 찾아와 감상
‘시센도 10경’ 미리 알고 가면 구경 도움
정원을 바라보며 명상하기에도 안성맞춤
집주인이 발명한 소리 내는 물받이 “명물”
인생 2막을 앞둔 은퇴자들의 로망 같은 곳
교토시 동북부의 작은 절 시센도(詩仙堂. 교토시 사쿄구)는 일본 ‘문인정원’(文人庭園)의 백미이다. 가쓰라리큐(桂離宮)와 슈가쿠인리큐(修學院離宮)가 왕실정원(연재 9회, 22회 참조)을, 료안지(龍安寺)나 다이토쿠지(大德寺) 방장의 가레산스이(枯山水. 연재 15회 참조)가 사찰정원을 대표한다면, 시센도는 작위도 벼슬도 필요 없는 문사철(文史哲)의 정원이다.
드높은 인문주의와 예술적 안목으로 조성한 공간에 주인의 인생 철학, 선과 다도, 문학과 예술에 대한 조예를 감추듯, 넘치듯 채워 넣은 품격 높은 문예살롱이다. 젊은 시절 출세의 꿈이 꺾인 뒤 변방을 돌다가 말년을 권회(卷懷)의 신선처럼 살다가고자 한 집주인의 인생관이 이런 정원을 만든 동력이었다. 그 경지로 인해 당대에는 최고위 귀족(상왕)의 선망을 받았고, 후대에는 멀리 서구 왕족(1986년 영국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 비)의 내방을 받았다. 시센도는 집주인 사후 시센도 조잔지(詩仙堂丈山寺)라는 이름의 절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나, 문기(文氣)에 흠뻑 젖은 사색과 명상, 정일(靜逸)한 산책을 바라는 교토 시민의 명정(名庭)으로 아낌을 받고 있다.
시센도는 이시카와 조잔(石川丈山. 1583~1672)이라는 은퇴한 무사 계급의 문인이 당시로는 인생의 황혼기도 지난 59살 때 지어 죽을 때까지 산 개인 집이다.
조잔은 17세기 일본에 한시 문학을 연 시인이자 서예가로 이름이 높았고, 다도에서도 이른바 문인차로 불리는 전다(煎茶)의 비조로 꼽힌다. 이념적으로는 유가(주자학)로서 선불교와 도가를 넘나든 자유인이었다. 정원 조성에도 뛰어나 시센도도 직접 구상하고 지었다. 그야말로 다재다예한 사람으로, 그때까지 가진 재산을 털어넣어 이 은거를 짓고 벗과 지인, 당대의 문사, 예술가들과 더불어 시대의 뒷길을 미련 없이 지나갔다. 인생 2막의 로망을 이룬 사람이라고 할까.
시센도의 본명은 오토쓰카(凹凸窠)이다. ‘울퉁불퉁한 집’이라는 뜻으로 이시카와 조잔의 인생역정을 상징한다. 하지만 내부는 세련되기 이를 데 없다. 시센도는 이 “울퉁불퉁하게 세련된” 집의 중심을 이루는 방 이름이다. 시선으로 추앙받는 시인들에 대한 존경을 담고 있다. 조잔은 집을 지을 때부터 역대 중국 시인 36명의 초상과 시를 모신 시센도를 구상했다고 한다. 당시 일본 전통 시의 한 대가가 일본 화가(和歌) 시인 36명을 골라 ‘가선당’(歌仙堂)을 꾸민 것을 보고 이에 대응해 지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당대의 유명 화가(가노 단유)가 초상을 그리고 조잔이 글씨를 쓴 이 시센노마(시선의 방)가 유명해지면서 오토쓰카라는 본명보다 시센도가 정원의 대명사로 세인의 뇌리에 각인됐다.
그럼 시센도 안으로 들어가 보자. 시센도 관상(觀賞)은 진입로와 건물, 실내와 정원 풍경, 그리고 뜨락으로 내려가 거닐며 즐기는 정원 등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조잔은 이 오토쓰카를 완성한 뒤 ‘오토쓰카 10경’을 자선(自選)했다고 하는데, 그것을 입구부터 차례로 돌아보자. 조잔이 10경의 제1경으로 꼽은 ‘쇼유도’(小有洞)라는 편액이 걸린 대나무 표문(정문)에 들어서면, 돌계단과 대숲으로 둘러싼 고요한 소로가 이어진다. 중문인 ‘로바이칸’(老梅關)을 지나면 본채 현관이 나오고, 위에는 전체 정원을 조망할 수 있는 누각 ‘쇼게쓰로’(嘯月樓)가 있다. 집채는 시센도를 중심으로 오른쪽에 정원을 마주한 서원이 있고, 왼쪽에 독서실 ‘시라쿠소’(至樂巢)가 있다. 독서실 앞 작은 마당에는 ‘고고센’(膏肓泉)이란 우물이 있고 건너에 시동 방 ‘야쿠엔켄’(躍淵軒)이 이어진다.
정원은 지형의 고저 차를 활용해 상하 두 개로 나뉜다. 서원 창으로 내다보는 위 정원에는 세상의 몽매를 씻고 간다는 의미의 ‘센모바쿠’(洗蒙瀑) 폭포와 폭포수가 이룬 얕은 연못 ‘류요하쿠’가 보인다. 아래 정원으로 내려가면 꽃밭을 거닐게 되는데, 백 가지 꽃이 있다고 해서 ‘?카노’(百花塢)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이 꽃의 제방과 흰모래 마당이 산과 바다의 짝을 이룬다. 서원 마루에 서서 위 정원을 조망한 뒤 뜰로 내려가 아래 정원까지 구석구석 거닐며 정원을 즐긴 다음, 다시 서원 마루에 돌아와 앉아 ‘액자 속의 정원’을 바라보며 명상에 빠져보는 것이 ‘관람의 정석’이다.
시센도를 구경할 때면 함께 떠오르는 것이 조잔이라는 사람이다. 당시 정권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가신으로 전도유망했던 그는 33살 때 벌어진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문과의 일전에서 공을 다투다 군율 위반 혐의를 받고 막부에서 사실상 축출되는 좌절을 겪었다.
이후 사무라이로서 출세의 길을 포기하고 주자학을 배워 유자의 길로 들어섰고,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지방 호족의 가신으로 장년기 대부분을 보냈다. 노모가 돌아가자 교토로 돌아와 자신이 꿈꿔왔던 삶을 살기로 결심했다. 그때가 54살이었으며, 5년 뒤 가재를 털어 지은 말년의 보금자리가 시센도였다.
시센도 표문에 걸려 있는 편액 ‘쇼유도’(小有洞)는 도가에서 ‘신선이 사는 곳’을 가리킨다. 그런데 현관에는 “신선스럽지 않게” ‘생사사대’(生死事大)라는 현판을 걸어놓고 있다. 인간에게 죽고 사는 것만큼 중대한 일은 없다는 ‘반전’이다. 시의 신선들을 모신 고상한 시센노마 옆에도 ‘육물명’(六勿銘)이란 이름의 일상준칙을 나무판에 새겨 걸어놓았다. 이 독거노인의 여섯 가지 생활지침은 다름 아닌 불 조심, 도둑 조심, 늦잠 금지, 편식 금지, 근검절약, 청소 철저다.
시센도의 아래 정원에는 ‘소즈’(僧都)라고 하는 독창적인 대나무 물받이가 있다. 흐르는 물이 대나무통에 꽉 차면 그 무게에 못 이겨 대나무통이 물을 쏟아내면서 밑에 받쳐둔 돌에 부딪혀 “딱” 소리를 낸다. 조잔이 소리로 정원을 해치는 새나 짐승을 쫓기 위해 직접 고안한 ‘발명품’인데, 농부들이 사용한 ‘시시오도시’라는 해수방지기에서 착안했다고 한다.
이 소즈와 비슷한 것으로 고대 중국에 유좌(宥坐)라는 그릇이 있었다. 물이 모자라면 채우고, 넘치면 쓰러져 덜어내고 다시 수평을 이룬다. 공자가 이 그릇을 보고 중용의 가르침을 설파했다는 고사가 중국 고전 <순자>에 나온다.
조잔은 한적한 고요를 깨는 소즈 소리를 특별히 좋아했다고 한다. 태양이 작열하는 오후, 완전한 정적을 가르는 단발의 이 소음은 정적을 깬다기보다는 오히려 정적의 밀도를 극도로 높인다. 마쓰오 바쇼(1644~1694)의 하이쿠, “오래된 연못/ 개구리 뛰어드는/ 물보라 소리”와 같은 미학이다. 조잔의 노년을 ‘위로’했다는 소즈의 소음은 동시에, 혹시 자신도 모르게 찌꺼기처럼 남아 있을 세속에의 미련을 경계하는 죽비소리의 역할을 했는지도 모른다.
이시카와 조잔은 아흔에 이른 어느 봄날 목련이 지듯 천수를 다했다. 젊은 시절의 쓰라린 좌절, 재능을 감추고 욕망을 억누르며 변방의 봉급쟁이로 살았던 장년기의 긴 침잠을 생각하면, 30년의 말년은 이루지 못한 꿈을 가슴속에서 꽃피운 시간이었을 것이다. 시센도는 그런 점에서 울퉁불퉁한 인생을 산한 늙은이에게도 신선의 낙원이었다.
글·사진 이인우 리쓰메이칸대학 ‘시라카와 시즈카 기념 동양문자문화연구소’ 객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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