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재단도 ‘낙하산 이사장’ 제도화하려다 발목 잡힌 오영훈 지사
도 “책임경영 강화·미래지향 역할 확대”
제주4·3평화재단 이사장을 제주도지사가 임명토록 하는 조례 개정안을 둘러싸고 도와 재단이 충돌하고 있다. 4·3 희생자 보상 등 특별법 개정을 이끌어내고 4·3 관련 정책을 핵심 도정으로 추진하는 오영훈 지사가 ‘낙하산 이사장’을 제도화하려다 재단과 시민사회단체의 거센 반발에 발목 잡히는 형국이다.
2일 제주도와 제주4·3평화재단(이하 재단)에 따르면 제주도는 재단 이사장을 임원추천위원회가 공모한 후 도지사가 임명하는 내용의 재단법인 제주4·3평화재단 설립 및 출연 등에 관한 조례 개정을 입법 예고했다.
조례 개정안에 반발하며 사퇴 의사를 밝힌 고희범 재단 이사장은 2일 제주도청 기자실을 찾아 이번 조례 개정안에 대해 “4·3 정신을 뿌리부터 뒤흔들 시도”라며 주장했다.
그는 도지사의 재단 장악 시도이며 4·3은 도지사가 독점할 수 없는 제주도민의 피의 역사라며 오영훈 지사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재단 이사장 “4·3 정치화, 4·3 정신 뿌리 뒤흔들 시도”
고 이사장은 제주도가 조례 개정의 이유로 △재단의 책임경영 강화 △이사회 선임 및 구성의 투명성 강화 △출자출연기관 관련법 적용 △지방공기업평가원 컨설팅 결과 등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했다.
고 이사장은 “상임 이사장이 아니어서 마치 책임경영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며 “그간 도의회 행정사무감사, 감사위원회 감사, 공기업 경영평가 등에 충실히 임해왔고, 지적을 겸허하게 받아들여 개선조치를 신속하게 취해왔다”고 주장했다.
이어 “이사장이 비상임이어서 책임경영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주장은 헌신적으로 무보수로 일해온 역대 이사장의 노고를 근거없이 폄하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사회 선임 및 구성의 투명성 강화’를 위함이라는 제주도의 주장에 대해서는 “감사위원회의 권고에 따라 이뤄지고 있는 현행 선임 절차에 투명성이 의심되는 대목이 어떤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고 따졌다.
그는 “적법 절차에 따라 선임된 이들이 유족과 도민의 의견을 반영하지 못하고, 결격사유라도 있다는 것이냐”고 되물었다.
‘출자출연기관 관련 법을 적용해야 한다’는 도의 주장과 관련해서는 “재단은 당초 행정안전부 산하의 독립적인 재단법인으로 설립됐고, 이에 따라 사업비는 국비로, 재단 운영비는 도비로 예산이 편성됐다”며 “이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재단은 출자출연기관에서 해제해야 한다는 의견을 수 차례 제기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4·3특별법에 의해 설립된 재단이 과연 제주도 출자출연기관과 어울리는 지도 의문”이라며 “국가 책무를 수행할 국가 단위 기관을 한 지방의 기관으로 격하하는 결과를 감수하면서도 도지사가 이사 임명권을 갖겠다는 것이 정의로운 해결인가”라고 성토했다.
고 이사장은 제주도가 재단 발전에 대한 협의 약속까지 내팽개쳤다는 주장을 폈다. 그는 “지난 10월 31일 회의에서 재단은 조례 개정안에 대해 분명한 반대 입장을 피력했고, 제주도의회 전문위원의 중재로 조례안에 대해 다시 협의를 진행하기로 했지만, 제주도는 오늘 입법예고를 전격 발표했다”며 “무엇이 그리 다급해 도의회의 중재까지 무시하는가”라고 비판했다.
“투명성 담보되지 않으면 대의 무너져”
제주도는 고 이사장의 기자회견 직후 조상범 특별자치행정국장의 긴급 브리핑을 통해 입장문을 내놓았다. 제주도가 전날 오후 브리핑에 이어 입장문을 내놓은 데는 고 이사장이 사퇴의 변에 이은 기자회견에서 소위 ‘역린을 건드린’ 주장에 대해 유감을 담은 오영훈 지사의 의중으로 보인다.
도는 ‘도지사의 재단 장악 시도’라는 고 이사장의 주장에 대해 매우 유감스럽다고 반박했다.
도는 “4·3의 정의로운 해결 과정에서 대의가 아무리 옳다고 해도 조직 운영의 투명성과 집행 과정의 정의로움이 담보되지 않으면 대의가 무너질 수 있다는 교훈을 잘 알고 있다”며 “이번 조례 개정도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며, 현행 법규 체계에 맞춰 조직을 정비하면서 한 단계 도약하기 위한 개선 과정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동안의 4·3의 해결 과정은 3만여명에 달하는 4·3 영령들과 눈물로 70여 년을 지내온 유족, 70만 도민들의 피땀 어린 노력으로 성취물”이라며 “이제 그 해결의 길에 중심적 역할을 수행하는 평화재단도 이러한 성격에 맞게 조직이 재편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제주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는 성명을 내고 “4·3의 정치화를 부추기는 조례 개정 추진을 멈춰달라며 고희범 이사장이 직을 던졌음에도 제주도는 이러한 호소조차 외면하고 있다”라며 “오영훈 지사는 독단적 4·3재단 운영 조례 개정을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이어 “제주도가 내세우고 있는 책임경영이라는 명분에도 조례 개정안의 핵심은 이사장과 선임직 이사의 임명권 문제이다”며서 “이는 제주4·3에 대한 국가 책무를 수행하기 위해 4·3특별법에 의해 설립된 평화재단에 제주도의 영향력을 강화하겠다는 의도로 해석 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이들 단체는 “평화재단은 오랜 세월 제주4·3 진상규명을 위해 노력해온 제주도민 모두의 것이다. 제주4·3 역시 특정 정파나 특정 정치인의 소유물이 되어서도 안 된다”라며 “사정이 이런데도 오영훈 지사는 평화재단 이사회의 반대 의견에도 조례 개정을 강행하고 있다. 이는 행정의 독단이며 오만이다"라고 지적했다.
이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제주4·3의 정의로운 해결을 외치는 오영훈 지사가 이렇게 독단적으로 강행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심히 우려스럽다”라며 “이미 차기 이사장 내정자에 대한 추측성 보도마저 나오고 있다”며 의문을 제기했다.
이 단체는 “이는 결국 재단을 제주도정이 사유화하겠다는 불순한 의도가 있다는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면서 “4·3 진상규명운동은 국가나 제주도정이 먼저가 아니라 제주도민들이 비극의 역사를 잊지 않고, 역사적 진실을 밝히기 위해 투쟁해 온 제주도민 모두의 역사이다”고 강조했다.
제주=임성준 기자 jun258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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