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코 타고 유라시아 질주 꿈꿨다…그런데 망했다"
'2018년, 자동차 동아리 친구들과 돈을 모아 '티코'를 샀다. 1991년 출시된 '그' 소형차 맞다. 이 차를 타고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할 거다. 바이칼 호수 정도는 갈 수 있겠지. 그런데… 6중 교통사고를 당했다. 모든 계획이 실패로 돌아갔다. 어떡하지?'
1일 오후 7시 한국과학기술원(KAIST) 창의학습관 로비에서 '망한 과제 자랑대회'가 열렸다. KAIST 학생들이 인생에서 맛 본 쓰디쓴 실패의 경험을 스탠딩 코미디쇼 형식으로 공개하는 자리다. KAIST 실패연구소가 지난 달 23일부터 3일까지 여는 '실패주간' 행사 중 하나로, KAIST 학내 학술행사동아리 아이시스츠(ICISTS) 학생들이 행사 기획부터 진행까지 도맡았다. 저녁 늦게 열린 행사임에도 KAIST 재학생부터 자녀를 동반한 일반 시민들까지 누군가의 '실패'를 듣기 위해 모였다.
●유라시아 대륙 횡단, 대학 첫 과제 성공할 '뻔 했는데' …'다 된 밥에 재 뿌리기' 된 나의 도전기
5번째 발표자로 무대에 선 박정수 KAIST 기계공학과 학생은 친구들과 티코를 타고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할 작정이었다. "과제도 많고, 시험도 많고, 프로젝트도 많은데 이 모든 걸 내가 뭘 위해 하는지 모르겠더라"로 말문을 뗀 그는 "그러던 중 자동차 만드는 동아리 친구들과 티코를 타고 여행하자는 계획을 2018년 세우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여행 계획에 돌입한 그들은 돈을 모아 중고 티코를 구입했다. 자동차를 사랑하는 기계공학과 학생임을 입증하듯 직접 부품을 사다가 여기저기 고장난 차를 수리했다. 인스타그램, 자동차 동호회 인터넷 카페 등에 여행 계획을 올렸더니 여기저기서 부족한 차 부품을 보내주겠다는 도움의 손길이 들어왔다. 판을 좀 더 키우기로 했다.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하며 거쳐갈 나라의 대한민국 영사관에 연락해 만나자는 약속을 잡았다. 내친김에 뱃지를 만들어 판매하기로 했다. 판매금은 기부하기로 했다.
이렇게 알찬 계획을 세웠는데, 티코를 운전하고 가다가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했다. 6중 추돌사고였다. 다행히 크게 다치진 않았지만 왼손에 부상을 당했다. 오랜 시간을 들여 신나게 준비한 여행 계획은 그대로 '망했다'.
황지웅 KAIST 기술경영학부·전산 학부 학생은 "과제 망한 썰을 들고 왔다"고 말했다. KAIST 학생이라면 누구나 거쳐야하지만, 높은 난이도를 자랑하는 '시스템 프로그래밍' 과제가 있다. 전산학을 전공하는 황 군에게는 첫 중요 과제였다.
10개 문제를 풀기 위해 주어지는 시간은 2주. 황 군은 첫 일주일을 들여 10문제 중 6문제를 풀었다. 이 정도면 다 풀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올라왔다. 그래서 조금 놀다가 제출 기한까지 마지막 3일이 남았을 때 나머지 4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다른 친구들보다 빨리 문제를 풀었거든요. 그래서 여유롭게 시작했는데… 마지막쯤 되니까 다른 애들이 다 끝낸 거예요. 마음이 급해졌죠." 라고 말했다.
마감 시간은 자정이었다. 결국 1문제를 못 풀고 과제를 넘겼다. '제출' 버튼을 누르고 친구들과 놀러나간 황 군은 마지막 1문제를 끝내 못 푼 게 마음에 걸렸다. "다들 만점 받는데 저만 못 푼 거면 점수를 못 받는 거니까요." 그런데 황 군의 고민은 뜻밖의 결말을 맞이했다.
시험 점수가 나오는 날, 결과는 '빵점'이었다. 과제를 제출할 때 입력하는 코드를 잘못 입력하는 바람에 모든 답안이 무효 처리됐다. 그는 "두 눈을 의심했어요. 시스템 오류라고 생각해서 조교님을 찾아갔어요. 그러고 나서는 엄청난 부끄러움이 몰려왔어요."라며 그 순간을 떠올렸다.
● 젊은 암 연구자에게 찾아온 혈관종… '실패'한 건강 관리 딛고 다시 암 연구로
문진우 KAIST 생명과학과 박사과정생은 '건강 관리'에 실패했다고 말했다. 그는 "2018년 기준 30세 미만 생명과학 연구자가 2973명인데 같은 해 25세~29세의 뇌종양 환자는 66명이에요. 이 두 개가 겹칠 확률은 3명 정도 되는데 그 중 한 명이 저였네요."라고 소개했다.
문씨의 집안에는 암 환자가 많았다.이러한 환경은 그가 2016년 KAIST에 진학해 암을 연구하게 된 계기가 됐다. "연구가 쉽지 않아 '아 진짜 암 걸리겠다' (농담 삼아) 얘기하면서 하루하루 폐암의 뇌 전이 연구를 정진했는데, 2018년 여름에 쓰러졌어요." 병원은 그의 우뇌에 직경 1cm의 혈관종이 생겼다고 진단했다. 수술을 하지 않으면 1년 밖에 살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생사의 기로에서 8시간 수술 끝에 중환자실로 이동한 그는 다행히 빠르게 회복했다. 일반 병실로 내려간지 일주일만에 퇴원했다. 대신 두개골 우측에 직경 5cm의 구멍이 생겼다. 평생 혈압과 식단을 관리해야 한다. 좌반신 감각도 많이 떨어졌다. 그는 "만 24세 뇌질환 환자라는 '빨간 딱지'가 붙은 것"이라고 말했다.
'앞으로 뭘 해 먹고 살지'라는 고민 끝에 그는 암 연구를 계속 하기로 결심했다. 교수도 "까짓 것 한 번 해보자"고 말했다. 한 번 실패했으니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해보자는 마음으로 계속 연구를 하기로 한 그는 4개월 간의 재활을 마치고 학업에 복귀했다. 2023년 3월 췌장암과 관련된 논문을 발표했다. 지난 10월 24일엔 박사 디펜스까지 성공적으로 마쳤다.
문씨는 "살아만 있으면 어떻게든 된다"고 말했다. 좌절의 경험을 나누기 위해 대전 사이언스 페스티벌에서 암 투병기를 공개하기도 했다. "청중에 앉아있던 한 어머니가 다가오더니, 자신의 아들도 지금 아픈데 생명과학에 관심이 있다며 (문씨가) 이렇게 아픈데도 여기까지 온 게 너무 고맙고 위로를 받았다고 말씀하셨다"며 "실패의 경험이 선한 영향력으로 발휘됐다는 게 신기했다"고 그 당시를 떠올렸다.
●KAIST 실패연구소 "실패가 아니라 실패를 해보지 않은 것을 두려워 해야"
유라시아 대륙 횡단에 실패하고, 교통사고로 인해 왼손 부상까지 입은 박 군도 포기하지 않았다. 오른손만 쓸 수 있는 상황에서 새벽까지 용접하고 코딩 작업을 했다. 함께 여행을 계획했던 친구와 자동차 수리 대회에 나가 수상까지 했다.
그는 "이 경험을 통해 실패를 해도 빠르게 회복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실패를 몇 번 해보니까 두렵지 않게 돼서 졸업할 때 쯤엔 마음 맞는 친구들과 로봇 사업을 벌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제는 대학원에 진학한 그는 "연구를 하다보면 성공보다 실패를 많이 하게 되는데, 연구를 실패하더라도 '예전에도 실패했었는데'하면서 매일 성장중이다"라고 말했다.
첫 과제에서 0점을 맞은 황군도 마찬가지다. "근거없는 자신감에 속지 않아야겠다는 마음가짐을 배웠다"는 그는 차분히 검토하는 습관을 갖게 됐다. 또 "그냥 과제를 포기한 게 아니라 2주 동안 정말 열심히 했거든요. 그래서 저 자신에게 당당했어요."라고 말했다. 친구들과 부끄러운 경험에 대해 이야기나누는 과정에서 많이 나아졌다고도 덧붙였다.
KAIST 실패연구소는 바로 이런 사례를 개발하고 연구한다. 조성호 실패연구소 KAIST 소장은 1일 전화 인터뷰에서 "한번 실패했다고 낙오자, 패배자라는 이름을 붙이면 실패를 하지 않기 위해 도전을 하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된다"며 "남들을 빨리 따라잡는 게 아니라 선도하기 위해선 남들이 하지 않는 도전적인 연구가 필요하고, 그러려면 실패를 두려워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2021년 6월 개소한 실패연구소는 학생들에게 강연을 제공하는 형태를 넘어서 학생들이 직접 실패의 경험을 하고 능동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활동을 늘려갈 계획이다. 조 소장은 "내 실패에 대해 남에게 얘기하는 게 쉽지 않겠지만 누군가와 얘기하다보면 심각하게 생각했던 것도 생각보다 별 것 아니었다는 걸 깨닫게 된다"며 "이미 정답이 있는 건 정보를 얻기만 하면 되지만, 아무도 해본 적이 없는 건 시행착오를 통해 새 정보를 만드는 것임을 담으려고 한 첫 행사"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실패한 것'이 아니라 '실패를 안 해 본 것'"이라고 덧붙였다.
[박건희 기자 wisse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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