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론 참칭한 ‘떼론’이 정치 파괴한다[시평]
‘매국노 처단’‘대대로 천벌’
소통 파괴적 현수막·구호 난무
팬덤 결합해 떼싸움 정치 변질
억지·생떼가 상식과 양심 압도
그레셤법칙 상황 갈수록 심각
‘사실’ 침몰 땐 민주주의 붕괴
‘나에게 한 발의 총알이 있다면 매국노를 처단할 것이다’라는 선언이 적힌 대형 현수막이 더불어민주당 어느 국회의원 지역구 사무실 부근에 내걸렸다. 국회에서 이재명 대표 체포동의안에 찬성표를 던진 것으로 의심받는 민주당 의원을 향해 이 대표 극렬 지지자들이 살해 위협을 공개적으로 천명한 것이다. 이들은 ‘넌 역적이다’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지역구 사무실에 난입해 난동을 부리기도 했다. 이와는 정반대로, 이 대표 구속영장을 기각한 유창훈 서울중앙지법 판사를 규탄하는 수십 개의 ‘근조’ 화환이 대법원 청사 앞에 줄줄이 늘어섰다. 화환들은 ‘판사 ××야’ ‘자손 대대로 천벌을’ ‘징계하라’는 등 각종 욕설과 저주가 적힌 장식띠로 둘려 있었다.
소개한 이 두 사례는 ‘공론’이 아닌 ‘떼론’이 지배하는 한국 정치의 비극적인 현실을 보여준다. ‘공론’은 대중의 ‘입’과 ‘귀’가 동시에 넓게 열린 상태, 즉 ‘말문’과 ‘말귀’가 균형 있게 활성화한 상태에서 발생하며, 집단 사이의 자유로우면서도 원활한 소통을 성립시키는 민주적 의견 표명 질서이다. 그 반면에, 떼론은 상호 분열돼 갈등하는 대립적인 대중집단들이 각자 ‘입’만 살고 ‘귀’는 죽은 상태, 즉 ‘말문’은 봇물 터지듯 열리지만 ‘말귀’는 꽉 닫힌 불균형 상태에서 발호하는 상호 공격적 의견 표출 질서이다. 떼론은 공중이 해체돼 정치 신념을 공유하는 동질적인 소분파, 즉 다수의 이질적인 ‘떼’로 분열되면서, 이들 사이의 극단적인 갈등을 배경으로 성장하는 유사 정론 또는 거짓 공론 질서이다.
대중의 ‘입’과 ‘귀’가 규율·사려·절제를 상실할 때, 즉 의견 표명의 ‘자유’가 ‘방종(放縱)’으로 변질·타락할 때 이러한 소통 파괴적인 떼론 질서가 범람한다. 떼론은 각각의 대립 집단들이 상대방에게 서로 절제 없이 마구 떠들며 고함을 지르는 ‘중구난방(衆口難防)’ 상태를 만들고, 그 결과 소통 질서는 도저히 수습 불가능한 난장판으로 퇴행하고 해체된다. 떼론이 정치를 지배하면, 대중은 삼삼오오 대오를 갖춰 각자 분열된 정파나 진영, 즉 ‘떼’에 가담한다. 연이어 정치와 언론이 협업해 대립적인 정치 분파를 조성하고, 여기에 하나의 정치 분파를 절대적으로 우상화하는 열성 팬덤(fandom)까지 결합하면서 서로서로 공격하는 악성 정치 질서가 도래한다.
떼론이 주도하면 다양한 관점들 사이의 통합·합의·조정은 불가능한 가운데 참호 속에서 벌어지는 육박전과 같은 무자비한 각개전투가 발생한다. 떼싸움의 과정에서 이성의 역할은 위축되고, 감정의 역할은 극단화하며, 객관은 신념에 의해 해체된다. 대중의 눈은 보고 싶어 하는 것만을 보고, 귀는 듣고 싶어 하는 것만을 듣고, 마음은 믿고 싶은 것만을 믿으면서, 사실을 보거나, 듣거나, 믿으려 하지 않게 된다. 집단 간 말싸움이 진행될수록 상호 대립하는 의견들은 처음보다 더욱 공고하고 왜곡된 절대 교리, 절대 신념으로 진화한다. 절대 신념의 세계에서는 무분별하고 일방적이며 극단적인 막말·저주·욕설 테러가 난무하고 예절과 겸양 언어는 위축된다. 그 결과, 떼론은 개인도 사회도 정치도 파괴해 버리고 만다.
떼론 질서는 소통 세계에서 ‘그레셤의 법칙’(악화가 양화를 몰아낸다)을 작동시킨다. 저급한 목소리가 성숙한 음성에 비해 더욱 크게 들린다. 불법이 합법을 이기고, 괴담이 과학을 능멸한다. 독선이 합리를 지배하고, 억지와 생떼가 상식과 양심을 압도하면서 여론의 질이 추락한다. 목소리의 크기가 진실의 크기를 결정하고, 대중은 사실을 믿지 않고 신념을 숭배한다.
민주당 국회의원 협박 사건도, 유창훈 판사 규탄 사건도, 모두 우리 사회와 정치를 좀먹는 악성 ‘떼론’ 질서에서 빚어진 일이다. 떼론 질서의 폐해는 특정 국회의원과 특정 판사에 국한되는 개인적인 문제로 그치지 않고, 우리 사회와 정치 전반을 병들게 하며, 나아가 나라 전체를 위기로 내몰고 있다. 우리는 떼론 정치를 떠나 공론 정치를 복원해야 한다. 우리나라에 더는 ‘떼론’이 ‘공론’을 참칭(僭稱)할 수 없는 참된 민주정치가 부활하고, ‘이념’의 쓰나미에 ‘사실’이 침몰하지 않으며, 명분으로 분장한 ‘독선의 입’에 의해 ‘상생의 귀’가 압살되지 않는, 밝은 새 시대가 오기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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