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뒤에 숨어 중고 거래 사기 행각 벌인 20대 범인, 초임 검사 집념에 구속기소
10대에 계좌·계정 빌려 중고사기 친 20대
전국 19개 사건 끌어모아 병합수사
이원석 총장 “피해자에겐 큰 사건” 격려
“받을 돈이 있는데 은행 계좌가 막혔어요. 계좌만 잠시 빌려주면 수수료 줄게요.”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모르는 사람에게 이런 제안이 들어왔다면 금융 지식이 있는 성인은 수상쩍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고등학생인 A양은 용돈벌이 정도로 여기고 수락했다. 몇개월 뒤, A양은 경찰에서 부모님과 함께 조사 받으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이 계좌가 인터넷 중고 물품 사기에 쓰였다는 것이다. A양 만의 일이 아니었다. 은행 계좌나 인터넷 계정을 빌려준 뒤 사기 범죄에 연루된 10대들이 경찰서를 찾는 일이 작년 하반기부터 전국 각지에서 벌어졌다.
비대면 중고 거래 시장은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을 계기로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반작용으로 중고 거래 사기도 급증했다. 2021년 경찰에 검거된 사기 건수는 8만건이 넘는다. 이 무수한 사건 속에서 피해 지역과 물품, 피해자 연령도 제각각인 19건을 끌어모아 병합수사한 2년차 초임검사가 피고인을 구속기소 하는 성과를 냈다. 이원석 검찰총장은 그에게 직접 메시지를 보내 “피해자 한명 한명에겐 큰 사건”이라며 “모아서 잘 처리해줘서 고맙다”고 격려했다.
1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서부지검 형사4부(부장검사 유효제)는 지난달 26일 전국에 산재됐던 인터넷 물품사기 사건 19건의 피고인 B(29)씨를 사기죄로 구속기소 했다. B씨는 작년 9월부터 올해 7월까지 중고 거래 플랫폼 당근마켓, 번개장터 등에서 명품가방, 무선 이어폰 등의 물품을 판매할 것처럼 속여 피해자 91명에게 1780만원 상당을 편취한 혐의를 받는다.
이 사건의 피해금액은 1인당 20만원에 불과하지만 어떤 피해자에게는 수개월을 겨우 모아 마련한 돈이었다. 또 10대를 방패막으로 세웠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인터넷 물품사기보다 악질적이다. 피해자가 사기 당했다고 인식해 신고를 해도 아무것도 모르는 10대가 조사를 받을 뿐 그 뒤에 누가 있는지 특정하기 어렵다. 자기도 모르게 범행에 연루 돼 경찰서 문턱을 밟은 10대들은 하나같이 큰 충격을 받았다.
이 사건의 주임검사인 홍준기(변호사시험 10회) 검사는 하루 100~120건 정도의 사건을 검토한다. 이 사건을 9월 배당받은 뒤 피해자의 탄원서를 훑어보면서 이런 사건이 한두 건이 아닐 거라고 직감했다. 온라인 사기 피해자 모임에서도 비슷한 피해를 호소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피해자들을 구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미성년자들을 동원한 범행 수법을 이대로 방치했다간 사회적인 해악이 클 것이라고 봤다.
이에 전산조회로 유사한 사건을 파악한 뒤 다른 검사실에 적극 요청해 관련 사건을 이송 받았다. 사기 수법은 물건을 팔 것처럼 글을 올린 뒤 돈이 입금되면 잠적하거나, 환불 요청을 하면 해줄 것처럼 대화를 하다가 자취를 감추는 식이었다. B씨는 처음에는 자기 계정·계좌를 이용하다가 사기피해 정보공유 사이트(더치트)에 등록되자 10대 뒤에 숨는 방식을 썼다.
홍 검사는 수사관과 함께 사건 하나당 200페이지, 거의 4000페이지에 가까운 수사자료를 야근, 주말 출근을 하면서 집중 검토한 끝에 약 40일 만에 B씨를 구속기소 할 수 있었다. 홍 검사는 법원의 구속 전 피의자심문에서 미성년자를 앞세운 범행의 악질적인 면과 무려 19번에 걸쳐 재범한 점을 강조했다. 홍 검사는 “경찰에서 19건에 대해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잘못했다, 다시는 안하겠다’고 했지만 범행을 지속한 점을 들어 구속 필요성을 설명했다”고 말했다. 구속영장이 발부되자 후련하면서도 자신의 부모와 동년배인 B씨 부친이 아들을 걱정하던 목소리가 생각나 마음이 쓰였다고 한다.
그는 인터뷰 내내 본인이 한 일이 결코 특별하거나 뛰어난 것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선배 검사들에게 일일이 연락해 “사건을 빨리 이송해달라”고 어렵사리 부탁한 것을 설명하면서도 “다른 분들도 다 그렇게 한다”고 말했다. 이 총장의 격려 메시지를 받고도 들뜸 없이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홍 검사는 어떤 검사가 되고 싶냐는 질문에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잘못한 만큼 처벌받도록 해야 겠지만, 잘못한 것보다 더 처벌받는 일이 없도록 묵묵히 일하는 검사가 되고 싶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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