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사랑이다”…대만 퀴어퍼레이드가 축제인 이유 [플랫][모두의 결혼, 반대 자격 묻다]
“사랑은 사랑이다(Love is Love).”
지난달 28일 대만 타이베이 퀴어 퍼레이드에 참가한 말레이시아 국적의 엘렌(31)은 ‘다양성’을 이렇게 정의했다. “사랑이 성 정체성, 나이, 성별 등 이유로 방해받아선 안 된다는 것이 다양성입니다.” 그의 애인 실비(30)도 “우리는 자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어떤 성적 지향성을 가지고 있든 그 역시 ‘나’”라고 말했다.
매년 10월 말 대만 곳곳은 무지갯빛으로 물든다. 수도 타이베이에서 아시아 최대 규모의 퀴어 퍼레이드가 열리는 주간이다. 올해 21회째를 맞는 타이베이 퀴어 퍼레이드의 주제는 ‘다양성과 함께 서다’이다. 성소수자뿐 아니라 이주노동자, 장애인 등을 포용한다는 뜻을 담았다. 조직위는 지역과 국가에서 발생하는 ‘모든 차별’과 싸우기 위한 연대의 장이라고 퀴어 퍼레이드의 올해 취지를 밝혔다.
퍼레이드 전날부터 대만은 ‘축제 분위기’
퍼레이드가 열리기 전날인 지난달 27일 오후 ‘타이베이의 명동’이라고 일컬어지는 시먼딩 홍루광장엔 노랫소리가 퍼지고 곳곳에서 무지개 현수막이 흩날렸다. 먼저 이날 오후 7시쯤 퀴어 퍼레이드 전야제 성격으로 볼 수 있는 ‘무지개 문화축제’와 ‘트랜스 행진(Trans March)’ 행사가 열렸다. ‘트랜스 행진’은 트랜스젠더(사회적 성과 생물학적 성이 불일치하는 사람)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 다양한 성 정체성을 가진 이들이 연대하기 위한 행사로, 대만에선 올해 5회째를 맞았다. 한국에선 아직 낯선 행사지만 미국·프랑스·캐나다·일본 등에서도 퀴어 퍼레이드 기간에 트랜스 행진 행사가 열린다. 유튜버 레오(31)와 카이(34) 게이 커플은 “초창기엔 트랜스젠더 행사를 반대하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5년째인 지금은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분위기”라며 “퍼레이드에 참여하기 어려워하는 사람들을 위해 유튜브 영상으로 행사를 담고 있다”고 말했다.
오후 7시30분쯤 트랜스젠더 단체를 중심으로 각 연대 단체들이 시먼홍러우(레드 하우스) 광장 입구에서 행진을 시작했다. 주변 상인들과 시민들은 분홍색과 파란색이 섞인 트랜스젠더 상징 깃발을 흔들며 호응했다. 한국에서 온 강현우씨(25)는 “대만은 정부와 다양한 단체들이 후원을 많이 해서 이런 행사가 가능한 것 같다”며 “한국과 다른 점”이라고 말했다.
올해 한국은 곳곳에서 퀴어 퍼레이드가 막혔다. 서울시는 서울 퀴어 퍼레이드를 위한 서울광장 사용을 불허했다. 2015년 이래 코로나19 시기를 제외하고 처음이다. 홍준표 대구시장은 퀴어문화축제를 두고 “시민에게 혐오감을 주는 축제는 안 했으면 한다”고 밝혀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반면 대만은 2019년 아시아 최초로 동성 결혼 합법화 법안을 통과시킨 데 이어 지난 5월엔 동성 부부가 입양권을 확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경향신문은 전 세계인들이 찾는 타이베이 퀴어 퍼레이드에 참여해 한국 퀴어 퍼레이드 현장 분위기와 어떻게 다른지 살펴봤다.
타이베이 시청 광장서 외치다 “그냥 결혼이야”
“올해 한국에선 동성 커플에게도 국민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해야 한다는 판결이 나왔어요. 동성 결혼이 인정받은 건 아닙니다. 동성 결혼도 합법적인 지위를 가져야 하고 성소수자들에게도 똑같은 권리가 있습니다. 대만은 (아시아권에서 처음으로 동성 결혼을 합법화한) 리더로서 성소수자 권리를 보장하는 데 있어 동성 결혼 합법화가 큰일이 아니라는 점을 다른 국가들에 보여줄 수 있습니다.”
지난달 28일 오후 2시30분쯤 추이링 국제앰네스티 대만지부 사무처장은 타이베이 시청 건물 앞 트럭 위에 올라 이렇게 말했다. 추 사무처장이 서툰 한국말로 한국지부 캠페인명인 “그냥 결혼이야”를 외치자 참가자들도 박수를 보내며 환호했다. 사회자는 “다 같이 한국에서 동성 결혼이 합법화될 수 있게 응원하자”고 말했다. 아시아 최대 규모의 퀴어 퍼레이드가 한국 상황을 알리면서 시작된 셈이다.
행진은 오후 2시20분쯤 타이베이 시청 앞 광장에서부터 시작됐다. 시청 건물 위엔 대만 국기와 무지개 깃발이 나란히 흩날리고 타이베이 광장은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참가자들이 가득 찼다. 행진에 나선 참가자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뽐냈다. 커플티를 입고 두 손을 꼭 잡은 게이와 레즈비언 커플, 무지개 천을 유아차에 두른 여성, 목에 무지개 리본을 단 강아지를 안고 걷는 참가자, 긴 웨이브 머리에 화려하게 화장한 트랜스젠더, 휠체어를 탄 장애인 등 다양한 참가자들의 얼굴이 보였다. 이날 퍼레이드에는 대만 성소수자권리운동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치자웨이도 함께 했다. 치자웨이는 1986년부터 30여 년 동안 많은 청원과 민사소송, 행정소송을 통해 동성 결혼 합법화를 위해 싸워왔다. 무지개 머리띠를 두르고 무지개 옷을 입은 치자웨이는 무지개 깃발을 흔들며 앞으로 나아갔다.
올해는 지난 1월 초국적 동성결혼이 가능해진 후 첫 퀴어 퍼레이드 행사였다. 8월에 결혼한 대만 국적의 에드윈(31)과 말레이시아 국적의 한썬(29) 부부는 서로의 손을 잡고 “결혼을 하고 참여한 퍼레이드여서 더 뜻깊었다”라고 말했다. 에드윈은 5월 입양권이 확대된 것에 대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공동입양도 꿈꿀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광장은 ‘시민 모두’의 것이어야 한다”
타이베이 퀴어 퍼레이드는 2003년 800여 명의 참가자들로 시작했다. 참가 인원이 점차 늘어 현재 10~20만 명 규모가 모인다. 2019년 동성 결혼을 합법화했던 해 20만 명이 참가한 것이 가장 많은 기록이다. 주최 측에 따르면 이날 참가자는 17만6000여 명으로, 지난해 12만 명보다 약 1.5배 늘었다. 퍼레이드는 시청 광장에서 시작해 북쪽과 남쪽 길로 나뉘어 걷는다. 모두 4km 남짓한 거리로 행진은 2시간 넘게 진행됐다.
성소수자들에게 시청 광장은 ‘해방 공간’이자 ‘안식처’였다. 다양한 국가에서 퍼레이드 기간 대만을 찾는다는 것도 실감할 수 있었다. 두 번째 타이베이 퀴어 퍼레이드에 참여한다는 스페인 국적의 사무엘 실바(38)는 “저와 같은 목소리를 내는 이들이 주변에 있다는 걸 확인하면서 위안을 얻는다”며 “자유와 권리는 우리가 모두 누릴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왔다는 마크(32)는 “샌프란시스코에선 반대 세력으로 행진이 어려운데, 대만에선 자유롭게 행진할 수 있다는 점이 새로웠다”며 “시청 광장이 서로를 연결하는 ‘허브’ 역할을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퍼레이드가 ‘축제 분위기’로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은 행사를 방해하는 반대·혐오 단체들이 없다는 점이 커 보였다. 경찰도 퍼레이드를 통제하기보다는 교통정리를 하며 질서 유지를 하는데 초점을 둔다고 했다. 현장에서 만난 타이베이 경찰들은 “한국의 상황은 반대 단체들이 방해했던 대만의 10년 전 상황과 비슷한 것 같다”며 “대만은 정부 차원에서 동성 결혼을 합법화했기 때문에 경찰도 그에 맞게 움직이고 있다”고 말했다. 세계 각국에서 사람들이 찾아오기 때문에 안전을 최우선으로 둔다는 설명이었다.
올해 서울 퀴어 퍼레이드는 서울광장 사용 불허 결정으로 을지로 일대를 행진해야 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국 참가자(27)는 “서울광장 사용 불허 결정은 마치 성소수자가 ‘시민의 일원이 아니’라고 부정당하는 것 같았다”며 “한국에선 혐오 세력의 방해로 퍼레이드가 잘 열릴 수 있는지 걱정해야 하는데 대만 분위기를 보니 광장은 ‘시민 모두의 것’이라는 걸 더 생각하게 된다”고 말했다.
행진을 마치고도 행사는 계속됐다. 각국의 연대 발언도 이어졌다. 양선우 한국 서울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장은 연대 발언에 나서 “서울 퀴어 퍼레이드는 매년 장소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서로를 존중하고 차별하지 않고, 다양성을 받아들이는 것이 평등한 사회를 만드는 길”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우리는 모두 다양하고 특별하다”며 “다양성이 존중되는 사회를 위해 같이 연대하면서 걸어가겠다”고 말했다. 참가자들은 양 위원장의 발언에 박수를 보내며 응원의 마음을 전했다.
서울퀴어문화축체 조직위는 올해 타이베이 퀴어 퍼레이드 행사에서 처음으로 부스를 운영했다. 양 위원장은 “대만에선 시민단체들뿐 아니라 많은 기업이 행사에 참여한다”며 “한국 기업들의 인식도 바뀌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번 퀴어퍼레이드에 참여한 기업 부스는 100여 개로 시민단체 부스 20여 개보다 5배 많았다.
“미래를 결정하는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어야”
대만에도 세대 간 인식 차이는 있다. 처우 딕슨(35)은 “5살 연하인 연인과 만난 지 3년 정도 됐지만 결혼은 생각하기 어렵다”며 “외동이라 가족들에게 아직 제 정체성에 대해 말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레즈비언 커플인 캐서린(16)도 “아직 가족들에게 알리지 못했다”며 “가족들이 과연 이해해줄까”라고 되물었다. 우이청 신주맥케이기념병원 의사는 “윗세대, 혹은 종교적인 이유로 여전히 성소수자에 대한 고정관념을 가진 분들이 많은데 꾸준한 캠페인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10대 청소년들은 “학교에서 교육이 더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대만은 2004년 성평등 교육 법안이 도입되면서 중·고등학교 교육과정을 통해 성소수자 인권 교육을 하고 있다. 그러나 충분하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아니타(17)는 “학교에서 성소수자에 대한 인권 교육이 더 많아져야 한다”며 “배운 만큼 우리가 서로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양번(17)은 “여전히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있는데, 학생들에게 영향을 많이 미치는 학교 교사들의 역할이 중요하다”며 “청소년들의 목소리를 전하고 싶어서 나왔다”고 말했다.
이날 퀴어 퍼레이드에는 유아차를 밀고 나온 이들도 많이 보였다. 세 살 아들, 남편과 함께 나온 동셰리(32)는“‘다양성과 함께 서다’라는 퍼레이드 메시지가 좋았다”며 “아들이 커 가면서 미래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 유선희 기자 yu@khan.kr · 최유진 PD yujinchoi@khan.kr
플랫팀 기자 fla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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