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순욱의 술기행](106) “소주에서 구수한 누룽지 맛이 나요.”
위스키 원료인 보리를 훈연시켜 맥아로 만들 듯, 쌀을 오븐에 구워 스모크향 내
“피트향 나는 스카치 위스키를 한국 재료, 한국적 제조방법으로 만들고 싶었다”
군고구마소주 역시 구운 고구마를 껍질째로, 으깨서 발효시킨 뒤 증류
가장 흔한 위스키 재료는 보리다. 옥수수 같은 다른 곡물을 원료로 한 위스키도 있지만, 위스키의 본고장인 스카치 위스키는 보리로 만든다. 그냥 보리는 아니고, 싹을 틔운 보리, 맥아, 즉 몰트가 위스키의 주원료다. 우리말로는 엿기름이라고 하는데, 술 외에 식혜 만들 때에도 엿기름, 맥아가 있어야 한다.
보리의 싹을 틔우는 까닭은 술을 만들 때 필요한 전분을 보리에서 추출하기 위해서다. 이 전분이 당분으로 바뀌고, 다시 당분이 알코올로 바뀌는 과정이 곧 발효다. 거칠게 말하면, 맥아(물과 효모가 필요하다)를 발효하면 맥주가 되고, 맥주를 증류하면 위스키가 된다. 우리술도 마찬가지다. 쌀(물론 물과 누룩이 필요하다)을 쪄서 발효하면 막걸리가 되고, 막걸리를 증류하면 소주(증류주)가 된다. 흔히 마시는 소주(희석식)는 이 과정을 거치지 않고 값싼 외국 농산물로 알코올 도수 95% 주정을 만들어 물을 많이 타고 감미료를 첨가해서 만든다.
그럼, 보리에서 싹은 어떻게 틔울까? 보리를 물에 담근 뒤 며칠동안 건조하는 과정이 보리의 싹을 틔우는 과정이다. 보리를 말릴 때 이탄(피트)을 연료로 사용하면 스모크한 향이 맥아에 배여, 증류한 후의 위스키에도 피트향이 도드라지는 위스키들이 있다. 이 피트향을 ‘스모키한 탄내’라고 보통 얘기하는데, 일부 위스키 매니아들은 피트향 강한 싱글몰트 위스키를 ‘최고의 위스키’로 친다.
스카치 위스키라고 해서 다 피트향이 강한 것은 아니다. 스코틀랜드의 작은 섬인 아일라(Islay)에서 만드는 싱글몰트 위스키 중 라프로익(LAPHROAIG), 아드벡(ARDBEG), 라가불린(LAGAVULIN) 등이 피트향이 강하기로 유명한 위스키다.
그런데, 한국에서도 스모크한 향이 나는 쌀소주를 만드는 양조장이 있다 해서 찾아가 보았다. 경기도 구리에 둥지를 튼 증류주 전문 양조장 화심주조. 2023년 8월에 양조를 시작했다고 하니, 정말 신생 양조장이다. 양조장 이름에부터 불(화)이 들어가 있다. 이곳의 소주 이름은 ‘화심 군쌀’이다. 쌀을 스모키하게 로스팅한 후에 누룩이 아닌 위스키 효모를 이용해 발효시킨 뒤, 2회 증류해 소주를 만든다. 25%, 40% 두가지 종류가 있으며 ‘화심 군고구마 40′도 최근 나왔다. 고구마를 오븐에 구운 뒤, 이를 분쇄해 역시 발효를 거쳐 군고구마 소주를 만들었다. 고구마소주는 일부 업체에서 만들지만, 군고구마 소주는 처음인듯 하다.
흔히 쌀을 원료로 술을 만들 때, 쌀을 불리는 과정을 꼭 미리 거친다. 쌀의 수분 함량을 늘리기 위해서다. 집에서 밥을 지을 때도 그러지 않는가. 쌀을 잘 씻은 뒤, 곧바로 열을 가하지 않고 30분 정도 쌀을 불린 뒤에 밥을 하면 밥알이 살아있듯이 탱글탱글하다. 술 빚기도 마찬가지다. 쌀이 갖고 있는 수분 햠량이 많아야, 술 빚기에 좋은 고두밥이 만들어진다.
그런데, 술을 만들겠다는 사람이 쌀을 더 불리기는 커녕, 쌀을 로스팅하다니? 쌀을 구우면, 쌀이 갖고 있는 수분이 날아가, 알코올로 바뀌는 효율성(생산성)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이런 발칙한 생각을 실천에 옮긴 사람은 대체 어떤 사람일까?
군쌀 소주를 만든 화심주조 오수민 대표는 스코틀랜드 아일라 섬의 ‘3대 위스키’ 중 하나인 아드벡 증류소에서 1년을 근무한 바텐더 출신이다. 국내와 해외에서 바텐더 생활을 10년간 했다. 바텐더의 사전적 정의는 바(Bar)에서 근무하며 술을 관리하고, 칵테일을 만들어 손님에게 직접 제공하는 직업이다. 그래서 바텐더는 기본적으로 수십, 수백 가지의 칵테일 맛과 레시피를 알고 있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수십, 수백 종류의 위스키, 진, 보드카, 데킬라, 브랜디 등 각종 주류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고객에게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
그래서, 오수민 대표에게 바텐더를 통해 배운 게 무엇인지를 먼저 질문했다.
“처음 바텐더는 멋으로 시작했다. 시작한지 얼마 안되어 겉멋 뒤의 깊은 술의 세계가 있음을 깨닫고 방대한 공부를 시작했다. 10개를 공부하면 몰랐던 100개가 보이고 100개를 공부하니 다시 몰랐던 1000개가 보였다. 영어 한마디 못하는 상태에서 무작정 호주로 건너가 수련을 계속하고 그렇게 하다보니 스코틀랜드까지 가게 되었다. 세상을 도는 모험을 계속하며 배운 핵심은 무엇이든 하면 될 수 있고 해도 안되면 될때까지 해내면 된다는 자신감이었다. 업적을 남기기 위해 시작한 일은 아니었으나 모험을 끝내고 뒤를 돌아보니 업적이 되어 있었다. 바텐더는 직업이 아니라 이렇게 모험하며 사는 삶의 자세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바를 떠나 양조장을 운영하고 있지만 나는 여전히 내가 바텐더라고 생각한다.
바텐더 업계에 내려오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손님이 주문하는 걸, 잘 만들면 3류 바텐더이고, 손님이 주문하지 않아도 취향을 고려해 알아서 만들어주면 2류, 손님조차도 모르는 손님의 술 취향을 찾아주는 게 1류라고들 한다. 이제 나는 고객의 주문을 받아 술을 만드는 바텐더에서 세상에 없는 술을 만드는 양조인으로 변신하고 있다.
바텐더 출신 양조인이 갖는 장점도 물론 있다. 특히 관능(제품 시음)적인 부분에서 큰 장점을 가진다. 내가 만든 제품을 시음할 때 바텐더 관점에서 마셔본다. 다년간 수련된 혀 위에서 제품을 분석하고 나서, 다시 양조사의 시야로 돌아와 제조공정을 보완한다.
양조사뿐 아니라, 창조를 하는 예술의 영역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자꾸 본인의 시선으로 작품(제품)을 평가하려는 경향들이 있다. 전통주 업계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소비자들이 진짜 원하고, 소비자들에게 새로운 세계를 보여줄 수 있는 제품보다는 양조사가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제품들 위주로 세상에 선보이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앞에 마주한 고객 취향의 술을 만드는 바텐더의 관점을 늘 잃지 않고 술을 만드려고 한다. 마시고, 고민하고, 또 보완한 술을 통해 행복을 전달한다는 면에서 바텐더와 양조사는 같은 일을 한다고 생각한다.”
그가 근무했던 스코틀랜드 아드벡증류소는 어떤 증류소인지도 물었다.
“스코틀랜드 서쪽 헤브리디언 제도에 있는 섬으로 제주도의 1/3정도 크기의 섬에 위스키 증류소만 11곳이 몰려있다. 이곳의 위스키는 이탄(피트)으로 건조한 맥아를 사용하여 만들어서 특유의 스모키한 풍미가 있다. 이 맛에 매료된 수많은 위스키 애호가들에게 위스키의 성지로 추앙받고 있다. 일본의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도 그 중 하나로 한달간 아일라섬에서 지내며 쓴 에세이집 ‘만약 우리의 언어가 위스키라면’이 유명하다.
아드벡 증류소가 다른 증류소와 크게 차이나는 점은 대형 발효탱크 소재가 나무라는 점이다. 대개는 스테인레스 소재다. 나무 소재 발효탱크는 세척이 굉장히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나무로 된 발효통은 완벽하게 세척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곡물 찌꺼기가 남아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옛날에는 모든 증류소들이 나무 발효탱크를 사용했다. 아드벡증류소는 이런 전통을 지금도 존중하고 있다.”
바텐더로 일년 정도 아드벡증류소에서 일한 오 대표는 그럼, 자신의 술을 만들 생각은 어떻게 했을까? 처음부터 자신의 술을 만들 작정으로 증류소에서 근무한 것일까?
“처음부터 내 술을 만들 생각으로 아드벡에서 일한 것은 아니다. 기회는 우연히 찾아왔다. 아드벡증류소 요리사가 한국요리에 관심이 많아, 김치를 만들어 맛보여준 일이 있었다. 그런데, 스코틀랜드에서 한국식 김치를 제대로 만들기는 어렵다. 배추는 물론, 젓갈, 고춧가루 등등 모두 다른 것 투성이다. 그래서 요리사에게 조언을 해줬다. ‘아일라 섬에는 가리비가 흔하니, 가리비조개로 젓갈을 담그고, 스코틀랜드 채소로 김치를 담그면 그게 스코틀랜드 김치가 되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런데 이 말을 내가 하면서 그 순간, 나 스스로가 깜짝 놀랐다. 스코틀랜드 맥아를 원료로, 이곳 증류기로 내려 최고의 스카치 위스키가 만들 수 있듯이, 한국식 위스키는 한국에서만 할 수 있는 플레이(제조방법)를 보여줘야만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영감이 떠올랐다. 스코틀랜드에서 하는 똑같은 방법, 가령, 맥아로 발효하고 또 증류하는 스타일은 일본에서도 하고, 대만도 그렇게 하고 있다. 한국인만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증류주를 만들어야, 경쟁력이 생긴다고 생각이 들었다. 지금 외국산 몰트를 수입해, 위스키를 만드는 양조장이 국내에도 여럿 생겼고, 또 이것도 의미가 크지만, 한국에서만 쓸 수 있는 원료로, 한국적인 제조기법을 사용해 만든 술이 오히려 더 글로벌 경쟁력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났다.
그래서 스모키한 위스키 스타일의 술을 만들고 싶은데, 굳이 위스키 원료인 맥아를 쓰지 않아도 될 방법을 고민해봤다. 그래서 한국에서 흔한 쌀을 맥아 대신 술 원료로 정했다. 그다음에 그렇다면 스모크 향은 어떻게? 실제로 이탄(피트)을 스코틀랜드에서 들여와 이탄으로 쌀을 구울까도 검토했는데, 이탄을 공급받기가 어렵고, ‘한국에서 스모키한 술을 만드는데, 굳이 스코틀랜드 이탄을 써야 하나’ 생각도 들었다.”
오 대표가 찾은 한국적인 스모키함은 누룽지였다. 누룽지로 스모키한 술을 만들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술 이름 화심도 여기서 나왔다. 스코틀랜드 아일라섬의 스모키함과, 한국의 스모키함을 연결해 줄 수 있는 이름을 찾다보니 ‘불 화’에 ‘마음 심’을 붙여 화심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바텐더 출신의 오 대표의 작품인 ‘군쌀 소주’는 어떻게 만드는 것일까? 군쌀은 구운 쌀의 줄임말로, 술 원료로 쓰는 쌀 일부를 정말 굽는다. 대부분은 굽지 않은 쌀을 쓴다. 구운 쌀은 실제 술에 들어가는 쌀 전부 중 5분의 1 정도다.
“연구개발 단계에서는 커피 로스팅 기계를 이용해, 쌀을 볶기도 했다. 그런데, 로스팅기보다는 오븐에 구웠을 때 술맛이 더 낫다고 판단해, 지금은 오븐에서 쌀을 굽는다. 200도 정도에서 1시간 30분 정도 익힌다. 군쌀 소주에 들어가는 쌀 전부를 굽는 것은 아니고, 5분의 1 정도만 굽는다. 스모키향을 내기 위해 5분의 1 정도의 쌀을 굽고, 알코올발효를 잘 하기 위해 나머지는 굽지 않은 일반쌀을 쓴다. 생쌀과 구운 쌀을 섞어 고두밥을 찌지 않고, 분쇄한 뒤 생쌀발효를 한다. 생쌀발효를 하는 이유는 곡물 본연의 향이 더 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발효시간도 위스키 발효와 마찬가지로 짧다. 72시간 정도 발효한다.”
화심주조는 누룩을 발효제로 쓰지 않는다. 당화발효(전분을 당분으로 바꾸는 것)제로는 정제효소를 쓰고, 알코올발효(당분을 알코올로 바꾸는 것)제는 위스키 효모를 사용한다. 일반적으로 쌀소주에는 전통누룩이나 개량누룩이 쓰이지만, 화심주조에는 위스키 스타일의 술을 만들기 위해 위스키 효모를 사용한다.
증류는 2회 한다. 1차 증류하면 알코올 도수가 25도, 2차 증류 때는 65도 정도의 알코올이 나온다. 증류원액은 약간의 안정화기간을 거쳐 곧바로 병입한다. 6개월 기본 숙성 같은 절차는 이곳 화심주조에서는 하지 않는다. 오수민 대표는 “숙성을 거의 하지 않은 제품이 스모키한 향이 더 나기 때문에 숙성을 가급적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장기 숙성을 포기한 건 아니다. 점차 오크통 구입량을 확대해, 오크통 숙성 제품을 늘려나갈 작정이다.
스모키한 향을 제대로 느끼려면 화심 25도 보다는 40도 제품이 제격이다. 은은한 단맛과 구수한 누룽지향이 매력적이다. 어릴 적 입으로 호호 불며, 뜨거운 누룽지를 식혀가며 먹던 추억을 떠올리는 맛이라고 할까? 음식이든 술이든 옛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먹거리에 후한 점수를 주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군고구마 소주는 오븐에 고구마를 구워, 껍질과 꼬다리도 제거하지 않은 상태에서 고구마를 으깨서 발효시켜 만든다. 군고구마소주에는 정말 군고구마 맛이 난다. “액체로 된 군고구마 자체를 마시는 느낌”이라는 평도 있었다고 한다. 오 대표는 “라벤더 같은 보라색 꽃향기를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생고구마 자체가 보라색 아닌가.
마지막으로 ‘나중에 화심주조가 반석 위에 오르면 뭘 하고 싶은지’ 물어봤다. “10년쯤 지나면 회사가 어느정도 안정화단계에 이를 수도 있겠지요. 그럴 때가 오면 제가 스코틀랜드에서 일했던 아일라섬에 다시 가서, ‘라이스 위스키 증류소’를 만들고 싶습니다. 모두들 스코틀랜드 맥아 위스키를 만드는 아일라 섬에서, 저는 한국인이 좋아하는 스모키한 위스키를 한국쌀로 만들고 싶습니다. 왜 그 나라에서 나지도 않는 한국쌀로 술을 만들 생각이냐고요? 스카치 위스키에 들어가는 맥아도 몰라서 그렇지, 수입산이 많습니다. 몰팅(보리를 맥아로 만드는 작업)을 스코틀랜드에서 할 뿐, 보리 자체는 외국에서 많이 수입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한국에서 쌀을 가져와서 술을 빚는다고 해서 낯선 풍경이 절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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