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라 선집 ‘활판 인쇄’, 최초이자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최원형 2023. 11. 2.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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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박성식 다빈치 출판사 대표
박성식 다빈치 대표가 1일 오후 서울 마포 한겨레신문사에서 활판인쇄로 제작한 중편 소설 선집 ‘노벨라33’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종이책은 저물고 있다’는 말을 쉽게 하는 요즘, 천년 이상 이어져 온 출판문화를 ‘되’새기고 ‘새로’ 새기는 선집이 나왔다. 인터넷서점 알라딘과 출판사 다빈치가 공동제작한 ‘노벨라33’은 세계 문학사에 깊은 발자취를 남긴 작가 33명의 중편 소설(노벨라) 33편을 골라 33권의 종이책으로 펴낸 선집이다. 두 가지 측면에서 눈길을 끈다. 사라져가는 ‘활판인쇄’ 방식으로 찍어냈다는 것이 하나, 단편에도 장편에도 속하지 않는 분량 때문에 상업 출판에서 소외되곤 했던 중편 작품들을 독립적으로 담아냈다는 것이 또 하나다.

1일 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난 박성식(58) 다빈치 대표는 “노벨라만 모은 선집을 활판인쇄로 만든 경우는 최초인 동시에 어쩌면 마지막일지 모른다”며 “평생 종이책을 만들어온 사람으로서 이미 쇠락해버린 장르와 쇠락해버린 인쇄기술을 ‘오마주’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노벨라 선집 자체에 대한 구상은 10여년 전부터 갖고 있었는데, 2년 전 ‘같이 해보자’는 최우경 당시 알라딘 대표의 제안으로 아예 활판인쇄로 만드는 작업에 착수했다고 한다.

‘노벨라33’ 활판인쇄에 쓰인 수지판. 알라딘 제공

활판인쇄는 활자가 볼록하게 새겨진 인쇄판을 종이 위에 직접 눌러서 잉크를 새겨 넣는 방식으로, 팔만대장경 이전부터 근대의 문을 연 금속활자 시대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거의 모든 ‘인쇄’를 담당해왔다. 그러나 1980년대 들어 시간과 비용을 크게 절약할 수 있는 컴퓨터 조판, 인쇄판을 감광하여 잉크를 바르는 ‘오프셋’ 인쇄 등에 밀려 자취를 감췄다. 박 대표는 “생산성만 따지면 ‘발전’이겠으나, 조각하듯 새겨넣는 활판인쇄는 미감이나 질감 등에서 뛰어나다. 오랫동안 간직하는 기록이란 측면에서는 활판인쇄가 더 낫다”고 말했다.

활판인쇄로 제작된 중편 소설 선집 ‘노벨라33’. 알라딘 제공

과거 방식만 고집한 것은 아니다. ‘노벨라33’은 컴퓨터로 조판한 결과물을 수지판에 조각해 종이에 찍는 방식으로 만들었다. 이전에 아예 없던 방식이라, 서체·종이·디자인 등 모든 면에서 시행착오를 거쳤다. 활판인쇄 인력과 인프라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식자공 권용국(89), 인쇄기장 김평진(74) 두 장인을 모셨고, 파주활판공방에 남아있는 100년 이상 된 반자동과 수동 활판인쇄기 두 대를 이용해 6개월에 걸쳐 전체 600만쪽이 넘는 분량을 찍어냈다.

인쇄기도, 두 장인도 고령이라 “혹시라도 몸도 기계도 못 버틸까” 조마조마했다고 한다. 기계가 고장나면 문제가 된 부품을 들고 을지로에 찾아가 새로 깎아야 했는데, 정확한 진단조차 어려워 이를 반복하길 여러 차례였다고. 그 결과로, ‘노벨라33’에 단정하게 박힌 활자들은 “첫눈엔 옛날 인쇄물 같지만 신선하고 모던한” 느낌을 준다. 이 때문에 시간과 비용이 크게 들었지만 다빈치나 알라딘이나 애초에 이익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고 했다.

활판인쇄로 제작된 ‘노벨라33’의 지면. 알라딘 제공

내용물에도 노력이 담겼다. 헤세의 ‘데미안’, 카뮈의 ‘이방인’처럼 이미 널리 알려진 작품들도 있지만, 10여권 정도는 “국내 초역이거나 예전에 한 차례 번역 출간된 것이 전부”일 정도로 새로울 것이라 했다. “그동안 중편 작품들은 상업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출간이 안 되거나, 되더라도 작품집에 구색 맞추기로 들어가는” 경향이 강했기 때문이라고. 오노레 드 발자크의 ‘공놀이하는 고양이 상점’은 국내 초역이고, 미겔 데 세르반테스 사아베드라의 ‘개들의 대화’, 안톤 체호프의 ‘결투’, 이디스 워튼의 ‘터치스톤’ 등도 널리 알려지지 못한 작품들이라 한다. 노벨라란 장르 자체가 서양에서 온 것이기에, ‘동양의 노벨라’란 의미를 담아 나쓰메 소세키의 ‘태풍’, 루쉰의 ‘아Q정전’, 채만식의 ‘냉동어’도 넣었다.

박성식 다빈치 대표가 1일 오후 서울 마포 한겨레신문사에서 활판인쇄로 제작한 중편 소설 선집 ‘노벨라33’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박 대표는 ‘노벨라33’을 마지막으로 출판계에서 완전히 은퇴할 계획이다. 대학 시절부터 사회과학 서적을 펴내는 일을 했던 그는 2000년 다빈치를 설립해 ‘클림트, 황금빛 유혹’(2002), ‘만화 서양미술사’(2003), ‘김영갑 1957~2005’(2006) 등 예술·인문 분야 책들을 주로 펴내왔다. 이미 3년 전부터 품절되는 책들을 절판시키고 저작권을 돌려주는 등 ‘폐업’ 준비를 해왔다. “이익을 목표로 출판을 하지도 않았지만 어쨌든 먹고살았고, 빚도 없어요. 운이 좋았죠.” 그렇기 때문에 ‘노벨라33’처럼 이익과 아예 무관한, 오직 “지나가버린 시대에 대한 오마주”로서 “불꽃놀이”를 벌일 수 있었다고 한다. “오늘날 출판의 가장 큰 위기는 실제 ‘책 만드는 일’이 무엇인지 모르는 채 그저 똑같은 껍데기에 이것저것 부으면 책이 나온다고 여기는 ‘기획 출판’ 풍토에서 온다”고 꼬집기도 했다.

‘노벨라33’은 1000부를 찍어 알라딘에서 북펀드를 진행하고 있다. 제작에 쓰인 수지판은 모두 해체했고 이를 북펀드 참여자들에게 사은품으로 증정한다. 따라서 ‘노벨라33’은 다시는 출간되지 않을 ‘한정판’으로 남게 된다. 알라딘이 올린 유튜브에서 제작 과정을 볼 수 있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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