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관 앞둔 대학로 한얼소극장…"포기않는 한 예술엔 퇴직 없어"
독일서 무언극 전공하고 직접 작품 연출…"연극인의 삶에 후회는 없어"
(서울=연합뉴스) 최주성 기자 = "난방기는 올해 처음 들였는데 써보지도 못하고 극장을 접게 됐네요. 새로 설치한 조명도 딱 한 번 썼는데…."
서울 대학로에 위치한 한얼소극장의 이건동(66) 대표는 20평 남짓한 극장을 둘러보다 눈길을 멈추는 일이 잦았다. 그는 붉은색 쿠션을 깔아둔 객석부터 소품으로 활용하는 액자까지 극장 곳곳에서 추억을 떠올리는 듯했다.
이 대표는 올해를 끝으로 가족과 함께 2002년부터 21년간 운영한 한얼소극장의 문을 닫는다. 지난 5월 건물주로부터 더 이상 임대가 불가능하다는 연락을 받았고 지난달에는 마지막 유료 공연을 마쳤다.
최근 연합뉴스와 만난 그는 "재계약 불가 통보를 받은 날은 우리 가족이 세운 한얼영화사가 이곳에서 촬영한 다큐멘터리 '연극'을 관객에게 처음으로 공개하는 날이었다"며 "저도 그렇지만 함께 인생을 바친 가족들도 그날 큰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어 "그렇지만 폐관은 곧 개관 아니겠나.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고 생각하니 금방 이해가 됐다. 임대 기간 내내 건물세를 올리지 않은 건물주에게 감사한 마음도 크다"고 덧붙였다.
이 대표는 대학로 한얼소극장에서 '거지의 죽음', '돈 쇼' 등 무언극 네 편을 공연했다. '거울인형'과 '기억해봐'는 20년 넘게 오픈런(상시 공연)으로 상연해왔다. 모두 독일 폴크방 국립예술대학에서 무언극을 전공한 이 대표가 직접 대본을 쓰고 연출한 작품들이다.
관객은 많아야 다섯 명이었지만 광고나 홍보에 의존하는 일은 없었다. 관객이 자기 발로 공연을 보러 올 때 편견 없이 작품을 만날 수 있다는 그의 철학 때문이었다.
그는 "천만 관객을 앞에 두고 공연하는 사람이 있으면 관객 한 명을 두고 공연하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고 본다"며 "금전적 성공을 바라고 연극을 올리는 한 연출가도, 예술가도 아닌 노예가 된다"고 설명했다.
1993년 독일 보훔 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수료한 뒤 귀국했을 당시만 해도 사람들에게 연극으로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컸다고 한다. 1996년 제주도에 '한얼소극장'을 차린 데 이어 2002년 대학로에도 극장을 개관했지만,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금전적 어려움으로 인해 제주도 극장은 서울 극장을 개관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을 닫아야 했다.
이 대표는 "대학로는 연극의 메카니 포스터만 붙여도 관객 20∼30명이 오는 줄로 믿었다"며 "관객이 아무도 없는 공연을 올릴 때는 마음이 아팠다. 그때만 해도 길거리로 나서서 사람들을 붙잡고 무료 공연을 보러 오라는 홍보도 해봤다"고 돌아봤다.
그의 버팀목이 되어준 존재는 기꺼이 '한얼 극단'의 식구를 자처한 가족들이었다. 아내는 조명과 음향 연출을 맡았고 네 딸과 막내아들은 생업을 병행하며 주말마다 배우로 무대에 오르고 있다. 과거 서울예대에서 강사로 활동했던 그는 극장을 운영하는 틈틈이 연극 강연으로 수입을 올리며 힘을 보탰다.
이 대표는 "한집에 살면서 늘 모든 것을 함께한 가족이 원동력"이라며 "가난한 부모님을 보며 아이들도 성숙해졌다. 지금까지도 많이 벌든 적게 벌든 가족 모두가 같이 생활비를 쓰고 있다"고 말했다.
가족이 연극에 모든 것을 쏟으며 살다 보니 어느 순간 인정을 받고 싶다는 욕심도, 돈을 벌고 싶다는 욕심도 사라졌다고 한다.
"연극에 잘하고 못하고가 어디 있겠어요. 연극인과 관객이 만나서 소통하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돈을 크게 벌 생각이었다면 48년간 연극인으로 살아오는 것도 불가능했죠. 연극인으로 살아온 삶에 후회만 없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대표는 12월 폐관 공연을 마친 뒤 새로운 공연장에서 연극 인생을 이어갈 예정이다.
그는 "가족들이 새로 차릴 극장은 몇 가지만 있으면 된다고 했다"며 "이제 임대 말고 우리의 극장을 가져보자는 것과 지하에 극장을 차리지 말자는 것이었다. 크기는 작을수록 좋으니 조건만 만족하면 어디든 상관없다"고 밝혔다.
새로 문을 여는 공연장에서는 일반인에게 연극의 재미를 알리는 연극 아카데미를 활성화하는 것이 목표다. 저마다의 인생 이야기를 연극으로 만드는 프로그램을 열 계획이다. '빛과 그림자'라는 제목의 새로운 무언극도 준비하고 있다.
"예술가는 스스로 포기하지 않는 한 퇴직이 없는 직업이죠. 앞으로도 제 인생이 된 연극과 함께 살아보려 합니다."
cjs@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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