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탄소 제국주의’ 시대의 식민지가 될 것인가
2023년 10월은 인류사에서 꽤 중요한 날로 기억될 것이다. 기후위기를 막기 위한 수단의 하나로 타국에 무역 압박을 가하는 제도가 시작하는 때이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유럽연합이다. 10월부터 유럽연합(EU)은 자국으로 수입되는 제품에 ‘탄소비용’을 매기는 시스템을 시행했다. 철강·알루미늄·시멘트·전력·비료·수소 등 6개 품목이 대상이다.
이 사상 초유의 제도 이름은 ‘탄소국경조정제도(Carbon Border Adjustment Mechanism)’이다. 줄여서 CBAM이라고 부른다. 낯설고 복잡한 이름이지만, 나라 간에 사고파는 상품에 ‘탄소세’를 매겨 지구온난화를 막자는 오랜 염원이 마침내 현실화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시사IN〉 제801호 ‘느슨한 규제 국가에 관세를, 한국 정부 ‘탄소국경세’ 준비되어 있나’ 기사 참조). CBAM에 대한 EU 측의 설명에는 ‘관세(Tariff)’라는 말이 나오지 않지만, 지난해부터 유럽 언론은 이미 녹색 관세(Green Tariff)라는 용어를 쓰기 시작했다.
당장 비용을 물어야 하는 건 아니다. 10월부터 2025년 12월까지는 ‘전환기간’이다. 전환기간에 해당 기업은 자기 기업이 제품 생산 과정에서 얼마나 탄소를 배출했는지 보고서를 분기별로 제출해야 한다. 첫 번째 분기별 보고서 제출 기한은 2024년 1월31일까지다. 기한 내 제출하지 못하면 벌금 등 불이익을 받게 된다. 본격적으로 관세를 지불해야 하는 2026년까지는 2년 남짓 남았다.
그럼 어떻게 관세를 물린다는 것일까? 탄소총량 등을 계산하는 CBAM의 세부 이행계획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지만, 일단 외국에서 물건을 들여오는 수입업자(바이어)에게 책임을 지운다. 수입업자는 수입품에서 발생하는 탄소의 총량에 따라 그만큼 ‘CBAM 인증서’라는 것을 구매해야 한다. 인증서 가격은 EU의 탄소배출권 가격에 연동한다. 탄소배출권 가격은 나라마다 다 다른데, 한국의 경우 t당 1만원 안팎, EU는 10만원을 훌쩍 넘는 추세다.
여기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2005년 EU가 가장 먼저 도입한 탄소배출권 거래제는, 어떤 기업이 정부가 정한 배출량 이상 탄소를 배출하면 배출권을 구매해서 이를 상쇄하는 제도다. 그런데 한국 정부의 경우 기업에 공짜로 탄소배출권을 나눠주고 있다. 현재 ‘무상 할당’ 비율이 90%에 이른다. 반면 EU는 발전부문은 100%, 산업부문도 70% ‘유상 할당’이다. 2034년까지 CBAM 대상 업종에 대해 아예 100% 유상 할당을 하겠다는 계획이다. 이 결과 EU의 배출권 가격은 계속 오르는 반면, 공짜로 나눠주는 국내 배출권 가격은 형편없이 떨어졌다.
만약 국내 기업이 철강 1t을 생산하는 데 탄소 2t을 배출했다면, 철강 1t을 EU에 팔기 위해서는 EU의 배출권 가격에 맞춰 20만원 이상 배출권 비용을 추가로 부담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국내에서도 CBAM 등에 대비해 무상 할당을 줄여야 한다는 지적이 잇따랐지만 산업계의 반발을 의식한 정부가 제도를 손보지 못한 채 ‘탄소국경세 시대’를 맞이하게 됐다.
더욱 큰 문제는 EU CBAM이 탄소배출량을 따질 때 간접 배출도 포함하겠다고 밝혔다는 점이다. ‘간접 배출’은 생산공정에서 발생하는 탄소 외에 열과 전력으로 인한 배출량까지 계산에 넣겠다는 것이다. 즉 국내 기업이 쓴 전력이 화력발전인지, 태양광·풍력 같은 재생에너지인지 따지겠다는 것이다. 재생에너지 비중이 세계적으로 한참 낮은 한국으로서는 날벼락이다.
한국 정부는 단기적 대응에 급급한 분위기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10월16일 EU CBAM에 대해 “유럽연합과 협의를 긴밀히 진전시켜 나가고, 대응역량이 취약한 중소·중견기업을 위해 탄소배출량 측정·보고·검증 컨설팅, 유럽연합 보고사례집 배포 등을 통해 밀착 지원하겠다”라고 말했다. 유럽연합과의 협의, 그리고 국내 기업에 대한 컨설팅 및 교육에 나서겠다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 9월 산업통상자원부·환경부 등이 공동으로 온실가스 배출량을 산정·보고하는 방법과 절차를 설명하는 안내서(가이드라인)를 제작해 배포했다. 500쪽이 넘는 분량이다. 중소기업 등을 위해 ‘탄소국경조정제도 도움창구’(1551-3213)도 10월5일 개소했다. 실제로 지난 9월 중소기업중앙회의 조사에 따르면, 300개 제조 중소기업 가운데 EU CBAM에 대해 파악하고 있는 중소기업은 21.7%에 불과했다. 도움창구를 운영하는 한국환경공단 관계자는 “온실가스 배출 문제에 밝은 인력 세 명이 상주하며 하루 평균 세 건 정도를 상담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당장의 보고서 작성에는 도움이 되리라 기대하지만, 기업이 실질적으로 온실가스를 줄이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미지수다.
절박한 포스코의 최후 수단은?
EU CBAM으로 가장 큰 타격을 입을 곳은 국내 탄소 배출 업종 1위인 철강이다. 철강업계는 2021년 기준 43억 달러(약 5조3700억원)를 EU에 수출했다. 국내 온실가스 배출 기업 순위에서도 포스코가 압도적 1위를 차지한다(〈그림〉 참조). 국회미래연구원이 2021년 발표한 ‘탄소국경조정 대응 산업지원 정책과제와 정책효과 예측 연구’라는 보고서는 2030년을 기준으로 EU CBAM이 전면 도입될 경우 국내 산업계의 총부담액이 8조2456억원이라고 추산하기도 했다(〈그림〉 참조). 다만 이 보고서는 올해 10월부터 적용될 6개 품목만이 아닌, 국내 전체 산업계를 대상으로 했기에 다소 앞서 나간 면이 있다.
포스코의 탄소중립 정책을 총괄하는 김희 탄소중립담당 상무는 최근 의미심장한 말을 꺼냈다. 9월25일 미국의 경제 매체 '블룸버그 통신'에 따르면, 김희 상무는 친환경 철강 제조로 전환하는 문제에 대해 “생산업체가 해외 국가로 눈을 돌리게 하는 요인이다”라고 말했다. 대다수 철강을 한국에서 생산하고 있는 포스코가 EU CBAM 등 높아지는 관세 장벽을 피해 친환경 인프라가 마련된 해외에서 철강 생산에 나설 수 있음을 시사한 것이다. 다만 김희 상무는 이를 ‘최후의 수단’으로 고려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도 움직이고 있다. EU CBAM과 비슷한 무역규제를 준비하고 있다. 지난해 6월 미국 의회가 발의한 ‘청정경쟁법안(CCA:Clean Competition Act)’이 그것이다. 석유화학제품 등 12개 수입품에 대해 탄소 1t당 55달러씩 관세를 부과한다는 것이 골자다. EU CBAM은 탄소배출권 가격에 따라 관세를 물리고, 미국 CCA는 탄소의 무게에 따른다는 점이 다르다. 영국과 캐나다 역시 탄소국경조정제도를 검토하고 있다. 세계 무역시장의 질서가 탄소 배출이 많은 기업은 살아남을 수 없게끔 바뀌어가는 중이다.
이것은 ‘협의’하거나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좋든 싫든 유럽과 미국 등 강한 나라들이 기후위기 대응을 게임 체인저로 삼고 전 세계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일각에서는 선진국의 이런 행보를 ‘탄소 제국주의(Carbon Imperialism)’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특히 IT 등 신산업에서 미국과 아시아에 뒤지고 있는 유럽은 녹색산업을 무기로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EU CBAM은 서막에 불과할 것이다. ‘탄소 제국주의’의 식민지로 전락할 것인가.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기후위기 대응 선진국으로 발돋움할 것인가. 한국은 위험한 기로에 서 있다.
이오성 기자 dodash@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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