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칼럼] 피해자서 가해자로… 歷史의 복수, 무섭기 짝이 없다

임지현 서강대 교수·역사학 2023. 11. 2. 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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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과거와 현재를 보라
홀로코스트 희생자였다가
팔레스타인엔 가해자로
자신들도 민망했을까
자칫 나치와 겹쳐 보일까봐
‘蜂起 기념관’ 방문 금지한 적도
가해자의 자기정당화 안 돼
희생자의식 민족주의 경계를
10월 21일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부상당한 한 남성을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옮기고 있다. /EPA 연합뉴스

하마스의 공격으로 시작된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의 추이가 심상치 않다. 전쟁이 격화되면서, 도대체 누구 편을 들어야 하냐는 질문을 받을 때가 많다.

홀로코스트의 가장 큰 희생자로 600만명을 잃은 유대인들의 고난과 희생을 충분히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지금의 이스라엘을 지지하기에는 무언가 걸린다는 막연한 느낌이 많은 사람에게 있다. 이 막연함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지금이야 유대인 하면 당연히 홀로코스트를 떠올리지만, 이차 대전 직후의 상황은 조금 달랐다. 아랍의 수많은 적대 세력에 둘러싸인 채 강한 독립국가를 세우고 지켜나가야 하는 상황에서, 신생 독립국 이스라엘은 홀로코스트보다는 바르샤바 게토 봉기를 더 높게 쳤다.

1943년 4월 19일 시작하여 5월 16일 막을 내린 바르샤바 게토 봉기는 처음부터 지는 싸움이었다.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유대인 봉기 지도부는 “독일 작자들이 우리가 죽는 시간과 장소를 결정하도록 버려둘 수는 없다”는 결기 하나로 봉기에 임했다. 이 젊은이들은 자신들이 택한 장소에서 자신이 죽을 시간을 결정했다.

이스라엘 의회 크네세트는 1951년부터 이스라엘력 니싼 27일을 “쇼아 기념일”로 정해 유월절에 일어난 게토 봉기를 기리고 있다. 그레고리력으로는 대체로 4월 말이나 5월 초가 되는데, 이는 유엔에서 정한 홀로코스트 기념일인 1월 27일과는 크게 다르다.

순한 양처럼 속수무책으로 나치에 끌려가서 변변한 저항도 못 해보고 대량 학살당한 홀로코스트는 이스라엘 건국의 주역들에게는 지우고 싶은 기억이었다. 이들에게는 유대인들의 용기와 저항의 표상인 바르샤바 게토 봉기가 더 소중한 기억이었다.

게토 봉기는 로마 군단의 압도적 군사력에 맞서 3년을 버티다가 항복 대신 집단 자결을 택한 고대 마사다의 유대인 영웅신화와 맞닿아 있다. 독립 직후 이스라엘의 공식 기억에서 게토 봉기의 영웅적 전사인 ‘시온주의자’나 ‘히브리 청년’은 홀로코스트의 희생자인 ‘유대인’과 뚜렷이 구분되었다.

나라를 잃고 유랑하는 유대인이나 히브리 전사들의 고난에 찬 역정은 식민지 시대부터 한국의 민족주의자들에게도 많은 공감을 낳았다. 1962년 2월 최고회의 의장 박정희는 가나안 농장을 방문해 “건국차”를 마시며 김용기 장로와 환담했다. 군용 잠바에 ‘라이방’을 낀 채 김용기 장로의 손을 잡고 기도하는 ‘이교도’ 박정희 의장의 사진은 우스우면서도 처연하다.

박정희에게 이스라엘 키부츠는 애국적 농업혁명의 상징이자 한국의 빈한한 농촌 근대화의 모델이었다. 비단 박정희 의장뿐 아니라 근대화와 동참한 많은 한국인에게 이스라엘은 발전 모델이었으며, 시온주의적 민족주의는 모범 답안이었다.

팔레스타인 청소년들의 이스라엘 저항운동이었던 인티파다 봉기가 한창인 1987년, 이스라엘 군부는 돌연 이스라엘 국방군 소속 병사들의 게토 봉기 기념관 방문을 금지했다. 바르샤바 게토의 어린 유대인 전사들을 학살하는 나치 군대의 모습에서 돌멩이를 든 어린 팔레스타인 청소년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자화상을 발견할지도 모를까 두려웠던 것이다. 홀로코스트 희생자의 후손들이 홀로코스트의 가해자처럼 비칠까 두려워하는 역사의 복수는 무섭기 짝이 없다.

가자지구를 맹폭하고 팔레스타인 청소년들에게 서슴없이 총을 난사하는 이스라엘의 전후 세대인 젊은 군인들은 홀로코스트를 경험한 바 없다. 그러나 홀로코스트가 끝나고 한참 후에 태어난 이 젊은 군인 중에는 자신을 ‘홀로코스트의 희생자’라고 간주하는 비율이 80%에 달하기도 한다.

다시금 홀로코스트라는 절대적 비극의 희생자가 되지 않으려면 강력한 이스라엘 국가가 필요하며, 그를 위해서라면 팔레스타인 청소년 수천의 목숨 정도는 별것 아니지 않냐는 자기 정당화가 이들에게는 너무 강하다.

때때로 이 자기 정당화는 희생자가 아니라 가해자가 되겠다는 욕망을 낳기도 한다. 비극의 역사에서 출발한 희생자의식 민족주의가 또 다른 비극을 낳는 가해자의 이데올로기로 변모하는 것이다.

과거의 희생을 담보로 현재의 가해를 정당화하는 이스라엘의 희생자의식 민족주의에서 한국의 희생자의식 민족주의의 미래가 보인다면 내가 너무 예민한 탓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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