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 지역·필수·공공의료 살리는 의대 증원해야
부산에서 대학을 다니던 지인의 공대생 자녀는 올해 상반기 의대 진학을 위해 휴학계를 냈다. 열심히 공부를 하다가도 취업 압박감이 컸는데, 의대로 진학한 친구를 보니 꽉 막힌 진로가 해결될 것 같은 기대감이 생겼다고 했다. 서울대 이공계 학과를 다니는 지인의 자녀는 올해 학기 초 같은 과의 20%가량이 휴학계를 냈다고 했다. 대부분 의대 진학을 위해서다. 지인은 “아이가 어렸을 때부터 키워 온 꿈을 이루고 싶어하는데, 지금은 자기 선택이 맞는지 확신이 안 선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최근 모임에서 만난 이는 서울 대치동에서 10여년 간 공부해 의사가 됐다고 했다. 유치원부터 대치동 커리큘럼을 따랐고, 초등학생 때 이미 고등학교 수학을 선행하는 등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했다고 한다. 그렇게 미친 듯이 공부해 의대를 진학한 20대 초반, 모든 삶에 의욕을 잃고 심각한 번아웃을 겪었다는 그는 “그냥 부모가 시키는대로 의대만 보고 살았다. 내가 뭘 잘하고, 뭐에 흥미 있는지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지나고 보니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 수 있는 시간이 다 흘러가 버렸다. 의대 입학이 지상과제가 돼 버린 건 정말 잘못됐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날 모임에서 이공계 학과를 다니는 자녀를 둔 이는 “아이의 과 동기들이 의대 입시를 하겠다며 휴학을 많이 했다. 왜 의사가 되려 느냐고 물어보면 하나같이 ‘돈 많이 벌려고’ 그런다고 했다는데, 이들에게 직업적 소명을 기대하는 건 사치일 것 같다”고 씁쓸해했다.
의대는 한국의 최상위 인재를 빨아들이는 블랙홀이다. 초등학생을 위한 의대 준비반이 수도권에 이어 부산에도 등장했으며, 입시 정점에는 ‘의치한약수’가 자리하고 있다. 예전에도 의대는 상위권이었지만 지금은 전국 의치한약수 밑에 서울대 이공계 학과가 자리할 정도니, 비할 바가 아니다. 입시 설명회를 가거나 관련 유튜브 등을 들어봐도 대부분 의대에 맞춰져 있어 다른 과에 대한 정보는 찾기도 어렵다. 이는 1997년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공고해졌다. 많은 사람이 졸지에 직장을 잃었고, 자영업자·사업가는 부도로 픽픽 쓰러지는 와중에 망하지 않고 밥벌이하는 직업이 의사라는 사실에 공감하면서다.
요즘은 의대 입학정원 확대 문제로 온나라가 들썩인다. 2006년 이후 17년간 연 3058명으로 묶여 있는 전국 의대 정원을 증원하자는 게 정부와 각계각층의 요구다. 하지만 500명, 1000명 등 구체적인 숫자가 나오자 의사협회는 3년 전 정부가 이 문제를 꺼냈을 때처럼 파업 등을 거론하며 강경 투쟁을 예고했고, 정부는 ‘인원 미확정’으로 수위 조절에 나섰다.
현재 의대 증원과 필수·지방 의료인력 확보에 대한 여론은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다. 복지부에 따르면 2020년 기준 국내 의대 졸업자는 인구 10만 명 당 7.2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13.6명)의 52% 수준이다. 그 결과 인구 1000명 당 의사 수는 2.1명으로 OECD 평균(3.7명)의 56%에 그친다. 전문가는 당장 이번에 입학 정원을 500명 이상 늘린다 해도 장기적으로는 의사 부족 상황을 해결하기 어렵다고 입을 모은다. 수도권·비수도권 할 것 없이 ‘응급실 뺑뺑이’와 소아과 오픈런이 일상이 되고, 비수도권 환자들은 더 나은 의료 서비스를 받기 위해 서울 ‘빅5병원’으로 향한다. 의사와 환자가 모두 수도권으로 쏠리니 지방 종합병원이나 의료원 등은 연봉 수억 원을 들이밀어도 의사가 없어 쩔쩔 맨다.
그렇다고 의대 증원 논의가 생명을 살리는 ‘수술 의사’ 대신 돈 되는 미용 의사 수만 늘리는 결론으로 가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의대 졸업 후 지금처럼 모두 수도권으로만 몰리지 않게 지역·공공·필수의료분야에 대한 정교하고 치밀한 개선책이 뒷받침돼야 할 것이다.
의료환경이 열악한 곳에 살수록 생명이 위급한 상황에서 의사가 없고, 장비가 없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불안이 크다. 더는 내 부모, 가족이 응급실 뺑뺑이를 하면서 상태가 악화되거나, 지역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치료의 골든 타임을 놓치는 일이 없도록 정부와 의료계의 묘안을 간절히 바란다.
메가시티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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