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시각] 흰 쌀밥 두 그릇
“어차피 이 세상에 올 때 아무것도 안 가지고 왔기 때문에 갈 때 아무것이 없어도 상관없다. 점심·저녁에 먹을 흰 쌀밥 두 그릇이면 하루가 충분하다. 당뇨가 있어서 가끔은 한 그릇만 먹는다.”
홍콩 배우 주윤발(周潤發·저우룬파)이 최근 한국에 왔다가 이런 말을 남기고 갔다. 내후년이면 고희(古稀)인 재산 56억 홍콩달러(약 9600억원) 부자. 뭐 이런 위선적인 발언이 다 있나 싶었지만, 13년 전 그의 언론 인터뷰 내용을 보고 맥락이 이해됐다. 그는 2010년 인터뷰에서 “죽으면 전 재산의 99%를 내놓겠다. 기부 캠페인을 하는 워런 버핏 등을 본받아 사회 환원을 결심한 것”이라며 기부 서약을 했다. “내 재산은 내가 벌어들인 것일지라도 영원히 내 것은 아니기에 세상을 떠날 때 아무것도 가져갈 생각이 없다. 이승에서 먹을 것이 있고 살 집이 있는데 더 무엇을 바라겠는가. 생로병사는 매우 자연스러운 것. 평범하면 행복하다가 내 좌우명이다”라고 했다.
짙은 선글라스를 끼고 불타오르는 100달러 위조지폐로 담뱃불을 붙이는 ‘영웅본색’ 아저씨가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정신을 실천한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삼시세끼를 최고급 캐비아로 채워도 될 만한 재력가가 하루 흰 쌀밥 두 그릇에 족하다니…. 그의 이 발언은 당일 국내 거의 모든 매체가 옮겼는데, 댓글이 수백·수천개 달리는 등 반향이 컸다. 아시아라는 같은 ‘밥’ 문화권 인사의 ‘밥그릇’ 비유였기에 사람들 마음에 더 와닿았을 것이다. 이 뉴스가 나온 날 점심을 한 중국집에서 거하게 먹고 바지 벨트까지 풀었다가 왠지 모를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 누구에게는 ‘흰 쌀밥 두 그릇’의 의미가 전혀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한 번 더 놀랐다. “하루에 단 한 끼라도 제대로 먹고 싶다. 아니 난 굶어도 좋으니 우리 애새끼들에게만이라도 밥다운 밥을 주고 싶었다”는 탈북자들 얘기다. 고위급 탈북자들이야 북한에서 가끔 닭고기도 먹고 끼니 거를 걱정은 안 했겠지만, 극소수인 이들을 제외한 다수 탈북자는 북한에서 끼니 걱정이 다반사였다고 한다. 얼마 전 만난 탈북자는 “이밥(쌀밥)에 고깃국 먹게 해주겠다는 1960년대 초 김일성의 약속은 휴지 조각이 됐다”고 했다. 그는 “60년이 흘러 그의 손자가 집권하고 ‘이것만 완성하면 다 된다’고 했던 핵을 사실상 가졌는데도 그때보다 더 많은 아사자가 속출하는 건 애초 약속을 지킬 의사가 없었다는 것”이라고 했다.
한국·홍콩은 물론 베트남 등 거의 모든 밥 문화권에서 이제 ‘흰 쌀밥 두 그릇’은 청빈의 소재다. 하지만 21세기 북녘 땅에서 ‘이밥’은 반대로 60년간 이뤄지지 않은 꿈의 소재다. 지난 24일 목선을 타고 동해로 귀순한 북 주민도 굶주림에 시달렸다고 한다. 부디 이들이 지금은 이밥에 고깃국을 먹을 수 있기를. 그리고 끼니뿐만 아니라 마음도 풍요로워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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