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춤 배운 사우디 춤꾼들 “뒤꿈치로 걷는 동작, 아랍 춤과 닮았어요”

이태훈 기자 2023. 11. 2.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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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디 왕립전통예술원 무용수 4인 한예종서 연수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온 젊은 무용수들이 서울 한국예술종합학교 서초동 캠퍼스 연습실에서 김삼진 무용원장이 한국 춤에 사우디 춤 동작을 녹여 만든 창작 안무작 ‘머지드 댄스(Merged Dance)’를 연습하고 있다. 상모를 돌리며 높이 뛰면서 둥글게 도는 사물놀이의 ‘자반 돌리기’를 응용한 동작에 에너지가 넘친다. /남강호 기자

“대개 춤은 발끝으로 움직이는데 한국 전통 춤의 기본은 발끝을 들고 뒷꿈치로 걷는 동작이더군요. 걸음걸이 뿐 아니라 눈부터 먼저 움직여 도는 회전 방식까지 사우디 아라비아의 전통 춤과 형제처럼 닮았어요.”

두 나라의 거리 만큼이나 춤도 먼 줄만 알았다. 하지만 사우디에서 온 젊은 무용수들은 그들이 직접 배우며 몸으로 느낀 두 나라 춤의 공통점을 앞다퉈 먼저 말하고 싶어했다. 최근 서울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 서초동캠퍼스 연습실에서 무용원장 김삼진(62) 교수에게 우리 전통무용을 배우러 온 사우디 무용수 네 사람을 만났다. 빌랄 알라프(35), 나와프·반다르 알로단(24) 쌍둥이 형제, 모하메드 알라시리(23).

이들은 2주간 서울에 머물며 한국 춤의 기본을 배웠고, 김 교수가 우리 춤의 골격에 사우디 전통 동작을 녹여 만든 창작 안무작 ‘머지드 댄스(Merged Dance·어우러지는 춤)’를 하루 8~10시간씩 연습했다. 오는 26~28일에는 사우디 수도 리야드 프린세스 누라 대학 극장의 약 1만5000명 현지 관객 앞에서 한예종 학생 무용수들과 함께 한국에서 배워간 춤을 공연할 예정이다. 큰 형 격인 빌랄은 “전통은 고루한 불변의 것이라 생각했는데 끊임없이 현대화하고 변신하는 한국 춤을 보면서 전통에 기반해 새로운 춤을 만드는 데 도전해보고 싶은 용기를 얻었다”고 했다.

김삼진 한예종 무용원장. /남강호 기자

사우디의 젊은 무용수들은 어떻게 한국 무용을 배우러 오게 됐을까. 김삼진 교수는 “3년여 전부터 사우디 측에서 수차례 서울로 직접 관계자들이 찾아와 전통 무용 협업을 요청했고, 이번에 성사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협력 주체는 2021년 출범한 사우디의 왕립전통예술원(TRITA·The Royal Institute of Traditional Arts). 통치자인 빈 살만 왕세자가 직접 이사회 명예 의장을 맡아 힘을 실어주고 있는 예술교육기관이다. TRITA는 한예종 뿐 아니라 영국, 프랑스, 중국 등의 교육기관과 파트너십을 맺고 전통 건축·공예·디자인 등으로 교육 과정을 늘려가는 중이다. 화석연료시대 이후를 겨냥해 문화·기술 국가로 나아가려는 사우디 국가발전계획 ‘비전 2030′의 일환이기도 하다. 김 교수는 “TRITA에서 이번 공연 안무를 내년 문을 열 예정인 무용원 정규 교과 과정으로 포함시키는 방안도 고려 중이라고 전해왔다”고 말했다.

춤 경력을 묻자, 이들은 약속이나 한듯 “걸음마 시작할 때부터 춤은 나의 인생이었다”고 했다. 춤을 사랑하고 춤에 미친 사람들. 그동안 연습하고 공연해온 춤의 배경은 힙합부터 현대무용까지 다양하지만, “한국에 갈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됐을 때 뒤돌아 볼 이유가 없었다”는 데에서도 한마음이었다. 빌랄은 “비행기에서 한국 땅에 내리는 순간 공기에서 달콤한 녹차맛이 나는 것 같았다”며 “처음엔 설레였지만, 지금은 한국의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됐다. 영원히 여기 살고 싶어졌다”며 웃었다.

김삼진(가운데) 한예종 무용원장과 그에게 우리 전통 춤을 배우러 온 사우디 젊은 무용수들. 왼쪽부터 반다르, 빌랄, 김 교수, 모하메드, 나와프. /남강호 기자

보수적 이슬람 국가인 사우디에서 남자 무용수는 흔치 않은 직업. 이들은 “남자가 춤을 직업으로 삼는다는 걸 이해 못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그런 사회 분위기도 꾸준히 변하는 중”이라고 했다. 최근엔 리야드에서 남녀 무용수 120명이 한꺼번에 무대에 오르는 대규모 무용 공연 ‘테르할(Terhal·항해 혹은 여정을 의미)’이 열리기도 했다. 이 역시 빈 살만 왕세자가 주도하는 개혁 드라이브의 효과 중 하나다.

한국 춤을 배우며 가장 인상깊었던 건 우리 춤 특유의 물 흐르는 듯한 ‘흐름(flow)’이었다. 반다르는 “사우디 춤에는 없는 ‘흐름’이 한국 춤에는 있다. 몸의 한 부분도 쉬지 않고 전체가 끊임없이 연동하는 흐름이 아름답다”고 했다. 나와프는 어깨 춤사위를 직접 해보이며 “손부터 팔의 모든 관절이 움직이는 이런 춤 동작도 처음”이라고 했다. 맺고 끊는 동작에 한국적 리듬감이 살아있다. 곁에 있던 김 교수가 “짧은 기간에 안무를 가르치느라 호흡법을 못 가르쳤다”며 아쉬워 하자 이들은 “그렇지 않다. 말로는 안 하셨지만 가르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한국 춤의 호흡을 느꼈다”며 웃었다. 김 교수는 “춤에 대한 열정이 대단해서 배우는 것도 빠르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는 훌륭한 학생들”이라며 웃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온 젊은 무용수들이 서울 한국예술종합학교 서초동 캠퍼스 연습실에서 김삼진 무용원장(가운데 검은 옷)의 지도로 한국 춤에 사우디 춤 동작을 녹여 만든 창작 안무작 ‘머지드 댄스(Merged Dance)’를 연습하고 있다. /남강호 기자

삼국유사에 기록된 ‘처용무’를 두 나라 춤의 첫 만남으로 본다면, 이번 한국과 사우디 전통 무용 협업은 ‘1100여 년 만의 재회’인 셈. 삼국유사는 처용을 신라 헌강왕 재위 5년(879년)에 지금의 울산 지역 개운포에서 왕의 행차를 따라 나선 동해 용왕의 아들로 기록하고 있다. 개운포는 아랍 지역과 활발히 교류한 무역항으로 알려져, 학계에서는 처용을 아랍이나 페르시아계 인물로 보는 시각이 많다. 2005년 이해찬 당시 총리가 아라비아반도의 나라 오만을 방문했을 때는 오만 문화부 장관이 “처용은 오만 사람”이라고 말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쌍둥이 형제인 반다르와 나와프는 “점프 장면을 소셜미디어에 올렸더니 사우디 친구들이 ‘그게 뭐냐, 가르쳐 달라’고 난리가 났다”며 웃었다. 김삼진 교수가 “자반돌리기”라고 거들었다. 사물놀이에서 상쇠가 머리로는 상모를 돌리며 높이 뛰면서 둥글게 도는 동작이다. 우리 눈에 당연하게 여겨지는 춤 동작에서도 외국인의 눈은 뜻밖의 흥과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있었다.

“스폰지처럼 여기서 배운 한국 춤의 모든 것을 흡수하려 했어요. 무용수로 살아가는데 큰 힘이 될 겁니다. 두 나라의 문화와 춤 교류를 위해 할 수 있는 한 돕고 싶습니다.” 이들은 사우디로 돌아간 뒤에도 원격 지도를 통해 김삼진 교수와의 연습을 이어갈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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