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거주 의무 폐지’ 입법 하세월… 4만여가구 피마른다

정순우 기자 2023. 11. 2. 03:02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정부 발표후 열달째 입법 차질

서울 영등포구에 살고 있는 직장인 김모(49)씨는 2년 전 청약 당첨된 강동구 ‘e편한세상 강일 어반브릿지’에 내년 2월 입주해야 한다. 지난 1월 정부가 실거주 의무 폐지 방침을 발표했을 때, 김씨는 고3 딸의 전학 문제 때문에 지금 사는 전셋집에 더 살기로 하고 지난 4월 전세 계약을 갱신했다. 하지만 ‘실거주 의무 폐지 법안(주택법 개정안)’ 국회 통과가 계속 미뤄지면서, 지금 상황이라면 전세 계약을 중도 해지하고 내년 2월 무조건 입주를 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300대 1 넘는 경쟁을 뚫고 청약에 당첨된 생애 첫 집을 분양가에 강제 처분해야 한다. 김씨는 “국회가 뚜렷한 이유도 없이 법을 개정하지 않는 이유를 모르겠다”며 “투기꾼도 아닌 나 같은 실수요자들만 피해를 보게 생겼다”고 말했다.

그래픽=백형선

지난 1월 정부는 ‘부동산 시장 경착륙’을 막겠다며 아파트 완공 직후 청약 당첨자가 의무적으로 거주하도록 한 ‘실거주 의무’를 빠른 시일 내에 폐지하겠다고 밝혔다. 당시 여당은 물론이고, 야당도 이에 반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곧 시행될 것 같던 법 개정은 10개월째 밀리고 있다. 정부 말을 믿고 기존 집 전세 계약을 연장했던 사람들은 입주 시점이 다 되도록 실거주 의무가 안 없어지면서 전세 계약을 중도에 해지해야 할 처지가 됐다. 새 집의 전세금으로 아파트 분양 대금을 치르려던 사람들도 자금 조달에 비상이 걸렸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올해 4월 기준 실거주 의무를 적용받는 아파트는 총 66개 단지, 4만3786가구에 달한다. 더구나 내년 4월 총선이 임박한 만큼, 연내에 법안 처리를 못하면 실거주 의무 폐지는 백지화될 가능성이 크다는 지적이 나온다. 21대 국회 임기가 끝나면 법안도 자동 폐기되기 때문이다.

◇우려되던 분양자 피해 현실화

실거주 의무 제도가 적용되는 아파트의 입주는 코앞으로 다가왔다. 600가구 규모의 ‘e편한세상 강일 어반브릿지’는 석 달 후면 입주를 시작해야 한다. 1300가구 규모의 ‘강동헤리티지자이’도 내년 6월이 입주다. 단군 이래 최대 규모 재건축 단지인 1만2000가구 규모의 ‘올림픽파크포레온’ 입주도 1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정부 약속과 달리 실거주 의무 규제 폐지가 미뤄지면, 청약 당첨자들은 큰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당장 입주가 여의치 않은 경우, 기존 전셋집 만기가 돌아오면 갱신 여부를 결정할 수가 없다. 자금 조달도 문제다. 자금력이 떨어지는 당첨자들은 새로 입주할 아파트를 전세로 주고, 그 보증금으로 잔금을 치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실거주를 하게 되면, 은행 대출 등 자금 계획을 다시 세워야 한다.

실거주 의무를 어기면 한국토지주택공사(LH)에 분양가 수준으로 아파트를 되팔아야 하고, 1년 이하 징역 또는 1000만원 이하 벌금형에도 처해진다. 한 입주 예정자는 “기존 전셋집을 중도 해지하려면 새로운 세입자를 직접 구해야 하고, 집주인의 중개 수수료도 부담해야 한다”며 “그나마 구하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보증금도 못 돌려받고 나와야 할 판”이라고 말했다.

◇연내 법 개정 못 하면 백지화될 수도

국회가 실거주 의무 폐지 법안을 통과시키지 못하는 것은 야당의 반대 때문이다. 지난 1월 정부가 폐지 방침을 밝혔을 때만 해도, 더불어민주당은 공식적으로 반대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하지만 상반기 ‘전세 사기’가 잇따르자, 실거주 의무가 사라지면 갭투자(전세를 끼고 주택 매입)가 성행하면서 전세 사기를 부추길 수 있다는 논리로 반대하고 있다. 실거주 의무 폐지 법안이 끝내 처리되지 못하면 내년 5월 국회 회기 종료와 함께 자동 폐기된다.

히지만 실제 청약 당첨자들은 대부분 실수요자라는 점에서 이 같은 ‘갭투자’ 우려는 지나치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양대 이창무 교수는 “실제 갭투자와 전세 사기는 기존 주택을 대상으로 이뤄지는 만큼, 새로 분양되는 아파트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며 “실거주 의무를 전세 사기와 연결시키는 것은 무리”라고 말했다.

☞실거주 의무

분양가 상한제가 적용돼 주변 시세보다 저렴하게 분양한 아파트의 청약에 당첨되면 무조건 2~5년간 거주하도록 한 제도. 본인이 입주하지 않으면서 전세를 끼고 집을 사는 ‘투기’를 막겠다는 취지로 2021년 도입됐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