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몰라도 독서 재미에 푹… ‘전화 책 친구’에 빠진 할머니들

이소연 기자 2023. 11. 2.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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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딸만 낳은 죄로 해산하고 닷새 뒤부터 밭일을 나가셨다. 우리 자매들은 번갈아 가면서 아기를 돌봤고, 아기는 방긋방긋 잘 웃어 우리 모두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김동헌 관장(57)이 여주시 금사면에 사는 홍모 할머니(83)에게 전화로 '새벽별은 베롱베롱'(책여우)의 한 구절을 들려주던 때였다.

제주도에 사는 또래 할머니 8명이 지은 책 이야기를 가만히 듣던 홍 할머니가 전화 너머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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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장애인에 책 읽어주는 사업
부천-여주-세종 등 전국 5곳 실시
“토지 읽어줄 수 있나” 반응 좋아
경기 여주시 ‘토닥토닥그림책도서관’의 김동헌 관장이 마을 어르신들에게 전화를 걸어 책을 읽어주고 있다. 김동헌 관장 제공
“엄마는 딸만 낳은 죄로 해산하고 닷새 뒤부터 밭일을 나가셨다. … 우리 자매들은 번갈아 가면서 아기를 돌봤고, 아기는 방긋방긋 잘 웃어 우리 모두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지난달 17일 경기 여주시에 있는 토닥토닥그림책도서관. 김동헌 관장(57)이 여주시 금사면에 사는 홍모 할머니(83)에게 전화로 ‘새벽별은 베롱베롱’(책여우)의 한 구절을 들려주던 때였다. 제주도에 사는 또래 할머니 8명이 지은 책 이야기를 가만히 듣던 홍 할머니가 전화 너머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나도 동생들 돌보느라 밖에 나가서 놀지도 못했는데…. 학교 다니는 친구들 앞에 동생 업은 모습을 보이기 부끄러워 늘 동구 밖 비탈로 다녔어. 글 배워 책 읽는 것이 그렇게 부러웠어.”

정식 교육을 받은 적 없어 글을 읽지 못하는 홍 할머니는 이날 책의 청자(聽者)로 생의 첫 번째 책을 만났다. 어린 시절 꿈꿨던 독서의 꿈을 여든 넘어 이룬 것이다.

2016년 문을 연 이 도서관은 2019년부터 마을 어르신에게 전화로 책을 읽어주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김 관장은 “글을 배우지 못해 책을 읽을 수 없거나 거동이 불편해 도서관이나 서점에 갈 수 없는 어르신들이 책과 만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도입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시작한 일이 이달부터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지원을 받아 ‘전화로 찾아가는 책 친구’ 프로그램으로 태어났다. 지원 대상도 어르신뿐 아니라 장애인으로 확대됐다. 한 달여 동안 전국 5곳(경기 부천·여주, 세종, 광주, 경북 칠곡)의 어르신과 장애인 375명을 대상으로 실시한다. 낭독활동가는 지역당 15명씩 총 75명이며 지원 예산은 1억 원이다.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은 “독서 사각지대에 놓인 고령자와 장애인이 책을 즐길 수 있도록 장기적으로 지원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단절됐던 책과의 인연을 이어가고 싶은 이들에게 희소식이다. 김 관장은 2021년에 만난 이대식 할머니와의 일화를 전했다. 그는 “당시 할머니가 박경리의 ‘토지’를 읽어 달라며 전화를 걸어왔다”고 했다. 독서를 좋아했던 할머니는 거동이 불편해진 뒤로 한동안 책과 연을 끊고 살았다. 전화로 책을 읽어준다는 소식에 신청한 것. 할머니는 “‘토지’는 굉장히 긴데, 괜찮겠냐”고 묻는 김 관장에게 “갈 수 있는 데까지 가 보자”고 답했다고 한다. 매주 하루씩 15분간 1년 동안 이어진 책 읽기 끝에 ‘토지’ 1권 마지막 장에 다다랐을 무렵 할머니는 “다음 주에 또 만나자”는 말을 남기고 연락이 끊겼다. 건강이 나빠져 요양원에 입원한 것이다. 김 관장은 “‘한 줄도 건너뛰지 말라’고 했던 할머니의 목소리가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할머니는 생의 마지막 책으로 ‘토지’를 영원히 기억할 것”이라고 했다.

김 관장은 “책을 읽어주는 게 끝이 아니다”라고 했다. “‘전화로 찾아가는 책 친구’는 궁극적으로 책을 통해 한 사람의 일생을 듣는 일이에요. 책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일 중 하나죠.”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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