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은형의 느낌의 세계] 교양 없다는 소리를 들을까봐
그 부끄러움이 나를 키웠지만, 이 시대의 교양은 뭘까
인생의 큰 도움까진 모르겠지만, 알아야 웃을 수 있다
즐거운가? 배울 점이 있나? 매력적인가? 친구를 선택하는 나의 기준이다. 어쩌면 동어반복일 수 있다. 배울 점이 없는 사람과는 즐거울 수 없고, 즐겁지 않은 사람은 매력적일 수 없으며, 매력이 없는 사람과는 즐거울 수 없기 때문이다. 열 살 연하인 Y를 만나는 일은 그래서 즐겁다. 통찰력과 어휘력이 남다르고 속이 깊어 함께 깊어지는 느낌이 든다. 우리 만남은 신조어와 밈과 짤 같은 이 시대의 교양을 학습하는 교육 현장이기도 하다. 당연히 스승은 Y다.
최근 Y에게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창비’를 몰라서 속상했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물었다. “계간지요?” 그렇다고 했다. 동료가 창비를 꺼내자 Y는 이렇게 말했다. “처음 봐요.” “이거를 처음 봐요?” 동료의 반응이었다. 창비에서 계간지를 내는 줄은 알았지만 실물은 처음 봤다고, 그래서 신기했다고 Y는 말했다. 하지만 동료의 당황하던 눈빛이 계속 떠오르고, 자기가 너무 교양이 없는 것 같아 속상하다고 했다.
이 ‘창비 사건’은 나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있었다. 이제는 Y처럼 똑똑하고 국문과를 나온 사람도 창비를 읽지 않는 시대인 것이다. 창작과비평사에서 내는 사회와 문학을 다루는 잡지 ‘창비’를 읽는 게 교양으로 여겨지는 시대가 있었지만 지금은 아닌 것이다. 궁금해졌다. 옛 시대의 필수 교양이 ‘창비’였다면 이 시대의 필수 교양은 뭘지. 예전처럼 책이 교양의 절대적 공급원이 아닌 이 시대의 교양은 과거 교양과는 다를 것이다. 내가 아는 거의 모든 것은 책에서 얻었지만 말이다.
‘세계 문학의 이해’라는 대학 시절 교양 수업이 떠오른다. 커리큘럼에 있는 세계 명작을 한 주에 한 권씩 읽고 독후감을 내야 했다. 학생들이 정전(正典·canon)을 읽길 바랐던 선생님의 충심을 알면서도 일주일에 장편소설 한 권 읽는 일은 쉽지 않았다. 다 해내서 보람이 있었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대충 읽거나 읽지 않고 독후감을 썼다. 하지만 이 책들이 중요하고 커다란 의미가 있다는 것을 느꼈기에 그렇게 하기가 무척 부끄러웠다.
나중에 이 문장을 보면서도 그랬다. “그들 나이였을 무렵, 그녀는 이미 구로사와의 모든 작품, 타르코프스키의 모든 작품, 펠리니의 모든 작품, 안토니오니의 모든 작품, 파스빈더의 모든 작품, 뵈르트밀러의 모든 작품, 사티야지트 레이의 모든 작품, 르네 클레르의 모든 작품, 빔 벤더스의 모든 작품, 트뤼포, 고다르, 샤브롤, 레네, 로메르, 르누아르의 모든 작품을 섭렵한 뒤였지만, 그들이 본 영화라고는 ‘스타워즈’가 전부였다.”(필립 로스 저, 박범수 역 ‘휴먼 스테인’ 문학동네) 필립 로스 소설의 ‘그녀’와 달리 이 마스터피스의 일부만 본 나는 또 부끄러웠다.
나의 부끄러움을 소환한 것은 Y가 부끄러움에 대해 말했기 때문이다. 스스로가 부끄러워진 Y는 교양 쌓기에 돌입했다. 타임라인에 보이는 책들을 모조리 사서 읽는 것이 Y가 택한 방법이다. 나는 웃으며 무슨 고시 공부 하듯이 교양을 쌓느냐고 했다. 또 일이 있었다고 했다. 앞에서 등장한 Y의 동료가 클라리스 리스펙토르와 마르그리트 뒤라스를 인용하며 지성의 날개를 펼치자 Y는 받아 적다가 눈물이 터졌다. 울면서 Y는 이렇게 말했다. “난 네 말을 이해하고 싶은데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겠어. 미안해.” 동료는 이렇게 말했다. “나도 모르면서 그랬어. 미안해.” 교양만 있는 게 아니라 덕스럽기까지 한 동료와 겪은 일화를 전하는 Y의 모습은 역시 내 스승답구나 싶었다.
교양을 가르치는 화상(畫商)이 나오는 영화 ‘스몰 타임 크룩스(Small Time Crooks·2000)’가 떠올랐다. 벼락부자가 된 여자가 교양 수업을 받기로 결심한 것은 함께 웃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동안이라는 여자의 칭찬에 “제 나이는 초상화에 새겨져 있거든요”라고 화상이 말한 것이다. 젊음을 유지하는 주인공을 대신해 초상화가 나이 드는 오스카 와일드의 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알아야 웃을 수 있는 이 장면을 보고 교양에 대해 생각했다. 교양은 나를 키웠고, 여전히 부족하고, 영원히 부족할 갈증 같은 것이라고. 하지만 교양 덕분에 그 말들을 이해할 수 있었고, 고통과 기쁨을 깊이 느꼈다. 교양은 인생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아도 이렇게 웃게 하는 건 분명하다. 그렇게 웃고 났을 때 이 세계는 비 온 뒤의 거리처럼 잠시 선명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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