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구 칼럼] 황혼의 산업화 세대, 그래도 깨를 턴다
광복·전쟁·산업, 한강의 기적
평생을 가족에 받쳐온 세대
이 땅에 산업화 세대가 계십니다. 1950년대, 10대부터 돈 버셨습니다. 1960년대, 20대에 동생들 건사했습니다. 1970년대, 30대로 자식들 챙겼습니다. 1980년대, 40대 돼서는 부모님 모셨습니다. 1990년대, 50대로 손주들 살폈습니다. 2000년대, 환갑을 넘겼습니다. 그래도 어깨에 진 짐은 여전했습니다. 그리고 2023년입니다. 새로운 걱정거리가 생겼습니다. 이제 내 몸이 걱정입니다. 혹시나 자식들에 부담 줄까 봐 두렵습니다.
맘대로 되지 않습니다. 성한 곳보다 성하지 않은 곳이 많습니다. 기억은 멀어지고 기력은 떨어집니다. 젊은이들은 '꼰대 세대'라 외면합니다. 그래도 한 가지 위안은 있습니다. 당신들을 '산업화세대'라 불러줍니다. 역사와 통계가 뒤를 받쳐줍니다. 1953년 GDP 477억원, 2014년 GDP 1천485조원. 3만1천배 늘었네요. 최빈국이 OECD 회원국에 올랐습니다. 원조받는 나라에서 원조하는 나라가 됐습니다. 누가 뭐래도 이건 맞죠.
그 세대의 한 분이 있습니다. 누구인지 모르셔도 괜찮습니다. 그 많은 산업세대 중 한 분입니다. 전쟁 통에 월남했습니다. 부모님을 모실 장남이었습니다. 동생들이 셋이나 됩니다. 내세울 건 몸 하나였습니다. 사이클 선수로 취직했습니다. 먹고 살려는 운동이었습니다. 경기 때 성적이 곧 생계였습니다. 설악산 오름길에 쥐가 났습니다. 못으로 피 내면서 올라갔습니다. 그런 봉급·수당으로 부모님 모셨고 동생들 가르쳤습니다.
60년대 말 파독(派獨) 열풍이 불었습니다. 넉넉히 준대서 갔습니다. 밤샘, 잔업을 도맡았습니다. 끼니는 빵과 소시지로 때웠습니다. 한국에서 오는 편지마다 돈 얘기였습니다. 생활비 부치라는 부모님, 결혼 비용 달라는 동생들이었습니다. 월급을 봉투째 보냈습니다. 어느 날 철근 더미에 깔립니다. 정신을 차렸을 땐 병원이었습니다. 장애등급자가 됐고 귀국당했습니다. 그 몸을 기다리는 책임이 있었습니다. 아들과 딸입니다.
80년대는 그래도 좋았던 시절입니다. 나라가 부자되고 개인도 부자되던 시기였습니다. 헌 집 허물고 새 집을 지었습니다. 미니 2층의 번듯한 양옥집이었습니다. '르망' 승용차에 부모 형제들 다 태웠습니다. 이 행복의 여유도 길지 않았습니다. 명예퇴직으로 쫓겨났습니다. 아들과 딸도 출가했습니다. 쉬어도 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못 쉽니다. 회사 하청 업체로 가서 일했습니다. 며느리, 사위, 그리고 손주를 책임져야 했습니다.
아들 생각에 편할 날 없습니다. 많이 보태주지 못해 마음이 무겁습니다. 딸에게도 뭐든 해주고 싶습니다. 청약부금 조금 보탰지만 더 못해 주니 미안합니다. 철 없는 손주는 할애비 돈을 제 돈처럼 압니다. 그래도 귀엽습니다. 양복 한 벌 해 입혔습니다. 텃밭에 배추, 무, 들깨 심었습니다. 집 옆 공터에 심는 농사입니다. 딸네 김장 해줄 겁니다. 두 번의 큰 수술을 받았습니다. 의식 없는 상태에 빠집니다. 나을 수 있을까요.
19일 오후, 볕이 좋습니다. 50m 거리의 텃밭엘 갑니다. 힘겹게 걸어갑니다. 말린 들깨를 집어 듭니다. 작은 막대기로 깻단을 두들깁니다. 기운이 없으니 털리지도 않습니다. 그러다 또 정신을 놓고 눕습니다. 다시 일어나 텁니다. 계속 저럽니다. 당신은 들기름을 싫어합니다. 딸 주려는 겁니다. 동네 아주머니가 보고 말립니다. "몸도 너무 안 좋으신데, 들어가세요". 그래도 계속합니다. 또 혼잣말을 하십니다. "우리 딸 줘야돼요."
제발 좀 내려놓으시지⋯. 그만큼 하셨으면 충분한데⋯. 그걸 못 버리고 안고 계시는지⋯. 다른 생각은 다 지우셨으면서…. -산업화세대의 마지막 책임감을 보고 있습니다. 이 땅의 모든 산업화 세대 어른들께 경의를 표합니다-.
※칼럼은 경기일보 독자 김광철님(86·화성시 안녕동 211)의 사연과 그 가족 증언에 기초했습니다.
김종구 주필 1964kjk@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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