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 窓]'MBTI'라는 환상

임대근 한국외대 인제니움칼리지 교수 2023. 11. 2. 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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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학생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제가 T라서 그래요"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심지어 '나는 T'라는 놀이가 유행이라고 한다.

성격유형을 나눠 설명한다는 MBTI 얘기다.

MBTI는 인간의 성격을 4가지 척도로 나눠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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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대근 교수

요즘 학생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제가 T라서 그래요"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심지어 '나는 T'라는 놀이가 유행이라고 한다. 성격유형을 나눠 설명한다는 MBTI 얘기다. MBTI는 인간의 성격을 4가지 척도로 나눠 설명한다. '내향(I) 대 외향(E)' '직관(N) 대 감각(S)' '감정(F) 대 사고(T)' '인식(P) 대 판단(J)'이 그것이다.

사람들은 세상을 나누기 좋아한다. 남자와 여자, 한국과 미국, 불교와 기독교, 영어와 한국어처럼 세상은 무수한 기준으로 나뉜다. 구별과 분류는 크고도 복잡한 세상을 이해하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사람들은 이렇게 세상을 인위적으로 나눠놓고 이 중 특정한 집단에 소속되고 싶어한다. 자신의 소속을 통해 존재감을 느끼고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청년들은 인터넷에 떠도는 몇 개의 간단한 검사를 통해 자신의 성격유형을 따져본다. 그렇게 따진 유형에 자신을 밀어넣어 소속을 확인한다. MBTI 척도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16개의 조합으로 나뉜 결과 중 하나에 소속된다. 예컨대 ISTJ와 ENFP는 섞일 수 없는 극단적 성격의 대립유형이 된다.

복잡한 현대사회에서는 전통적 인간 유형의 구별이 힘을 잃게 됐다. 그러자 이를 대체하려는 새로운 기준이 생겨났다. 12간지로 나뉘는 '띠'는 인간 유형을 나타내는 전통적 방식이다. 쥐, 소, 호랑이, 토끼 등 태어난 해를 상징하는 12개 동물의 특징을 끌고와서 성격을 구별한다. 심지어 소띠와 말띠는 결혼하면 안 되고 개띠와 토끼띠는 궁합이 잘 맞는다고 말한다.

요즘 청년들은 12간지 동물에 자신을 밀어넣지 않는다. 비과학적인 동물 띠가 자신의 성격을 대표할 수 없다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내가 개띠라서 그래요"라고 말하는 사람을 근래에 본 적이 없다. 인간의 성격 유형을 동물 띠로 설명할 수 없다는 생각이 퍼지면서 12간지는 이제 허울뿐인 기준이 됐다.

한동안 혈액형으로 성격을 판단하는 일도 유행이었다. 네 종류로 나뉘는 ABO식 혈액형을 기준으로 각각을 특정한 성격과 연결하는 '놀이'였다. 처음엔 그러려니 했지만 혈액형과 성격의 상관관계에 대한 믿음이 과도하다고 판단한 학자들이 이런 기준이 얼마나 비과학적인지 줄기차게 지적하자 그 기세가 꺾였다. 세상을 고작 넷으로 나누고 거기에 특정한 개인의 복잡한 성격을 집어넣어 설명하는 방식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지 이제 모두 알게 됐다. 혈액형과 성격유형 놀이도 사그라졌다.

MBTI도 허울뿐인 기준이다. 세상을 정확히 둘로 나누고 이 중 하나에 속하라는 폭력적인 기준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넷, 열둘, 열여섯의 기준으로 모든 인간을 유형화할 수 있다는 믿음 자체가 폭력이다. 흰색과 검은색 사이에는 무수히 많은 회색이 놓여 있다. 검은색에 가까운 회색도 있고 흰색에 가까운 회색도 있다. 외향에 가까운 내향도 있고 내향에 가까운 외향도 있다. 인간의 성격은 단순히 알파벳 두 글자로 설명할 수 없이 복잡하고 다양하다.

MBTI를 과신하면, 자신이 특정 성격유형에 소속된다고 과도하게 믿으면 거꾸로 그에 기대 자기를 강화하게 된다. 다양한 가능성을 무시하고 '나는 T'라는 프레임에 스스로 갇히게 된다. 원래부터 '나는 T'라서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게 아니라 '나는 T'라고 믿기 시작하면서 생각, 감정, 행동을 합리화한다.

이런 현상은 어쩌면 우리 사회가 그만큼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싶어하는 개인에게 적절한 소속감을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일 수도 있다. 나는 누구인지 알고 싶지만 누구도 알려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누구인지 자신의 성격, 소속, 정체성을 확정할 수 있는 주체는 자신밖에 없다. "제가 T라서 그래요"라는 말은 "제가 AB형이라서 그래요" "제가 개띠라서 그래요"라는 말과 다를 바 없는 텅 빈 고백이다

임대근 한국외대 인제니움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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