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삶] 가의 인생

기자 2023. 11. 1.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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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에 대세요, 가에.” 친구 차를 타고 먼 거리 출장길에 올랐다. 숙소 주차장이 꽉 차 있어서 당황하던 찰나, 때마침 밖에 나온 주인분이 말씀하셨다. “가상이요. 가상에 대세요.” 경상도에 왔는데 전라도 사투리가 들려서 잠시 귀를 의심했다. “어디의 가요? 어느 가상이요?” 친구가 다급히 물었다. “저기 가요.” 주인분이 가리킨 곳에는 차 한 대가 가까스로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밭을 것 같은데요?” “가상에 잘 대면 괜찮아요.” 운전을 잘하는 친구 덕에 무사히 가에 주차할 수 있었다.

숙소로 올라오는데 자꾸 헛웃음이 났다. 예의 가상이 가상(假想)이나 가상(假像)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평소라면 절대 차를 대지 않을 곳이었다. 가상의 적을 만들고 가상의 세계에 빠져든 사람만이 그 공간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환영을 보듯 현실 속에서 거짓 형상을 마주하는 사람만이 그 공간에 감히 주차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잘 알고 있다고 믿었던 ‘가’라는 단어의 비밀을 하나 발견한 듯도 싶었다. “‘가’의 향연이었네. 그렇지?” 친구가 활짝 웃었다.

그날 밤 내내 내 머릿속은 ‘가’로 우거졌다. 가는 사전적으로 “경계에 가까운 바깥쪽 부분”을 뜻한다. 길가의 ‘가’를 떠올리면 된다. ‘가’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불안함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어린이가 가에 앉아 있으면 어른은 떨어질지 몰라 염려한다. 가에 있는 게 편해서 자리 잡았는데, 다시 가운데로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된다. 같은 이유로 가에 있는 사람은 주목받지 못한다. 가에 위치하겠다고 마음먹은 사람은 자발적으로 중심에서 멀어진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남의 이목에서 벗어남으로써 혼자의 상태로 선선히 진입하는 사람이다. 어쩔 수 없이 가로 밀려난 사람도 있지만, 가에 있는 것들을 살피려고 일부러 심신을 옮기는 사람도 있다.

또한 ‘가’는 “그릇 따위의 아가리의 주변”을 일컫기도 한다. 이때의 ‘가’는 흔히 흘리면 안 된다는 명령과 함께 쓰인다. 꿀이나 참기름 따위의 액체가 가를 타고 흐르기 쉽다. 가는 액체가 흐르는 것을 막는 최후의 보루이자, 그 액체가 타고 흐르는 경사면이 된다. 그러므로 가에 위치한다는 것은 경계에 서겠다는 의지이기도 하다. 주변과 친해지겠다는 다짐이기도 하다. 가에 있어야만 중앙부를, 중앙부에 담긴 내용물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음은 물론이다. 순순히 가에 다가가는 사람은 ‘겉’이 아니라 ‘속’을 궁금해하는 사람이다. 등잔 밑이 어둡듯, 속에 있으면 여간해서 속사정을 알기 어렵다.

‘가’는 주변부를 가리키는 것이지만, 가에 다가가는 사람만이 볼 수 있는 장면이 있다. 화단의 이름 모를 꽃, 우체통과 헌 옷 수거함, 전봇대 아래 웅크린 고양이, 보도블록을 비집고 고개 내민 잡초, 길의 한가운데를 바삐 오가는 사람들의 갖가지 표정…. 가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가는 오히려 누군가의 비밀한 공간으로 거듭날 수 있다. 광장 한가운데에서 확성기를 든 사람에게 일제히 이목이 쏠리지만, 그때 가에 있는 사람은 자기만의 이야기를 만들고 있다. 길가에 핀 꽃을 유심히 들여다보는 아이, 지렁이가 기어가는 것을 종종걸음으로 따라가며 지켜보는 소녀, 가의 공간을 활용해 사람들에게 웃음 주는 글귀를 적어두는 어른 등 가와 친한 사람들은 누군가를 해칠 마음을 품지 않는다. 그들은 ‘가’에까지 마음을 쓰기 때문이다.

출장에서 돌아오는 길, 갑의 인생이 아니라 가의 인생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가에 있다가 지나가는 사람에게 인사도 건네고 발을 헛디디는 사람의 손을 잡아주는 삶 말이다. 중심을 지향하지 않아도 되니 마음의 짐도 덜 수 있을 것이다. 가에 있다가 남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을 가지고 글을 쓸 수도 있을 것이다. 가의 인생이 가(可)의 인생이 될 때까지 말이다.

오은 시인

오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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