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를] 가족보다 식구

기자 2023. 11. 1. 21:02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출출한 가을밤엔 짜장라면이 제격입니다. 물을 끓이고, 면을 삶으면 어디선가 나타난 3초 진돗개, 우리 나비는 제 무릎께에서 아련한 눈빛으로 저만 바라봅니다. 파기름에 검은색 수프까지 버무려 제대로 된 라면을 먹일 수는 없으니, 면 끓인 물을 덜어내는 공정에서 나비 몫 두어 젓가락을 찬물에 씻어 덜어둡니다. 제가 까만 면발을 한입 가득 먹을 때마다 나비에게는 희멀건 라면 한 올이 돌아가는데, 맛도 없고 몸에도 안 좋은 그 한 젓가락에 둘이서 키득키득 한없이 행복합니다. 동물병원 일을 하니, 자주 듣는 이야기가 ‘우리 강아지는 무, 배추를 좋아한다’ ‘당근을 좋아한다’ 좋아하니 먹여도 되느냐 묻는 것인데, 라면까지 나눠 먹는 수의사 나부랭이가 무슨 염치로 할 말이 있을까요? 그런데 개들은 정말 나물이며 야채가 맛있어서 좋아하는 것일까요?

포유강 식육목에 속한 갯과 동물이니 본디가 육식동물입니다. 밀가루나 푸성귀를 좋아할 리 없으나 무리를 짓는 그들의 습성에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무언가를 함께 먹는다는 건 무리의 일원으로 인정받는 것이고, 우두머리와 먹이를 나누는 행위엔 성취감이 따릅니다. 그 행복이 육식동물로 하여금 풀조차 먹게 만듭니다. 식구 되기를 갈망하여, 우리에게 식구가 되어주는 겁니다. 그들이 지어누리고자 하는 무리는 가족이 아니라 식구입니다. 인간에게는 가족만이 식구였던 역사가 있으니, 오늘날 가족과 식구는 얼핏 같은 것으로 혼용되고 있지만, 찬찬히 뜯어보면 꽤 다른 의미입니다. 혼인이나 혈연에 기반하여 인간들 스스로 규범과 법률로 정한 것이 가족이라면 ‘먹을 식’에 ‘입 구’ 식구는 끼니를 나누고, 시간을 나누고, 감정을 공유하여 마음을 나누는 게 본질입니다.

핵가족이라는 말이 등장한 것도 어느새 50년이 훌쩍 지났습니다. 가족은 사람이 만든 제도이니 산업화, 도시화에 발맞춰, 사람의 편의에 따라 그 형태가 변해왔습니다. 이제는 ‘핵개인’의 시대에 접어들었다 하더군요. 스마트 기기의 보급과 발전, AI와 로봇과학의 발달이 핵개인화를 가속시키고 있다는 진단이지만, 매사 효율과 가성비를 따져 ‘갓성비’를 추구하고, 그저 인생이 아니라 ‘갓생’을 살고자 하니, 그 필요에 의해 가족의 형태는 또 한번 변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 변화와 때를 같이하여, 영국에서는 외로움부 장관직이 신설되었고, 많은 나라가 뒤를 이어 인간의 고독으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적 비용을 측정하고 개선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우연일까요? 빨라지고 편해지는 세상은 그 대가로 우리에게 외로움을 강요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식구가 없다면 그 대가가 더욱 가혹하겠지요. 외로움이라는 것을 겨우 가족이라는 구속과 규범에 실낱같이 기대고 있었던 것도 잘못입니다.

식구와 가족의 의미를 다시금 되짚어보는 게 필요한 대목입니다. 사람도 무리를 지어 사는 동물인데, 사람을 생존케 해온 무리 또한 가족이 아니라 식구였습니다. 가족의 형태가 변화하는 것은 오롯이 받아들여 놓아줘야 합니다. 놓아줘도 아까울 것 없습니다. 가족보다 식구를 갈망하고 누군가에게 식구가 되어주려 노력해야 하는 시대입니다. 가족과 남을 나누어 가르는 대신, 이미 나에게 식구가 되어주는 사람들을 알뜰히 살피고, 나 또한 당당히 무리의 구성원으로 인정받으려 노력할 때, 괜찮은 친구, 괜찮은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다.

김재윤 수의사·우리동물병원생명사회적협동조합 대표원장

김재윤 수의사·우리동물병원생명사회적협동조합 대표원장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