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준의 문뜩] 짜장면과 금반지
사실 짜장면은 만만한 음식이었다. 한참도 더 전에 짜장면이 졸업식에나 먹을 수 있는 고급요리이던 시절도 있었지만, 언젠가부터 짜장면은 출출한데 주머니가 넉넉하지 않을 때 부담 없이 고를 수 있는 첫번째 선택지였다. 그런데 요즘 이 짜장면이 만만치가 않다. 짜장면값은 그동안 큰 요동 없이 꾸준히 올라왔는데, 코로나19 사태 이후 가파르게 오르더니 지난달에는 한 그릇에 7000원(서울 평균)도 넘겼다.
짜장면도 억울할 수 있다. 만만하던 짜장면이 이렇게 오르는 동안, 웬만한 음식들 모두 가격표 앞자리 수를 바꿔 달았기 때문이다. 냉면 1만2000원, 국밥 1만원이 보통인 시대인지라, 짜장면에는 여전히 대표 서민음식이라는 타이틀이 그리 어색하지 않은 모양새다.
그런데 이 서민음식 짜장면은 의외로 물가당국과 치열한 투쟁 역사를 갖고 있다.
서민의 배고픔을 달래주는 식품이라는 영광은, 반대로 정부가 반드시 가격을 안정시켜야 한다는 말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격을 올리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시도때도 없이 윽박지르고, 기습적으로 가격을 올린 중국집에는 위생점검으로 보복하는 일이 빈번했다.
급기야 1970년대 초에는 ‘가격협정요금’이라는 걸 만들어 짜장면값을 100원 이상 올리지 못하게 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정부의 시야에서 벗어나기 위해 탄생한 변종 짜장면이 바로 유니짜장이니 쟁반짜장이니 하는 것들이었다. 눈앞의 인플레이션 압력을 무시하고 아무리 눌러봐야 가격을 잡아둘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 뒤 한동안 자취를 감춘 가격통제는 역설적이게도 자유시장을 금과옥조로 떠받들던 보수정부에서 다시 등장했다. 2011년 이명박 정부는 3분기 물가 상승률이 5%에 육박하면서 성난 민심에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물가대책회의가 열리고 전 부처가 물가당국인 양 물가를 끌어내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공정거래위원회 수장이 “우리는 물가관리 당국”이라며 가격 인상에 나선 식품업계를 단속했고, 고가의 프리미엄 라면을 내놓은 업체에 대해서는 광고한 대로 진짜 프리미엄 제품이 맞는지 영양성분 분석을 의뢰하기도 했다. 교육당국이 ‘교육비 안정화 점검단’이라는 것을 구성해 원비를 올린 유치원 명단을 뽑아 교육청에 통보하는가 하면, “기름값이 묘하다”는 대통령의 한마디에 ‘석유제품가격 태스크포스’가 구성돼 정유사들을 쫓아다니기도 했다.
52개 집중관리 생필품 리스트를 만들어 MB물가로 묶어 관리하고, ‘배추 실장’ ‘삼겹살 차관’처럼 품목별 물가를 담당 공무원이 이름을 걸고 관리하는 취지의 물가실명제까지 도입됐다.
그럼에도 급등한 물가를 끌어내리는 일은 쉽지 않았는데, 물가 상승의 주된 원인이 나라 안이 아니라 금융위기 이후 전 세계적인 인플레이션 압박에 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백약이 무효이던 상황에서 정부는 통계청 물가지수 구성 품목에서 물가에 부담을 주던 ‘금반지’를 제외하면서 기적적으로 목표 수치를 달성했다.
한동안 잊고 지내던 금반지의 기적이 다시 떠오른 것은 최근 물가 급등에 대응하는 정부의 모습이 과거 MB 정부와 묘하게 겹쳐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7월 6.3%를 고점으로 완만하게 하락하는 듯했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8월 다시 3%대로 뛰어오르더니 지난달 4%를 위협할 정도로 급등했다. 올 초까지만 해도 물가안정을 자신하던 통화당국도 슬슬 하락 속도가 예상보다 더디다는 전망을 공식화하고 있다.
뚜렷한 ‘상저하고’의 실익 없이 물가까지 기대를 배신하면서 정부는 최근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처럼 움직이고 있다.
장차관들이 또다시 하루가 멀다 하고 식품·외식업계를 찾아다니며 협조를 당부하고, “전사적인 원가 절감을 통해 가격 인상 요인을 최대한 자체적으로 흡수해달라”는 노골적인 ‘요청’도 시작됐다. 또 다른 한쪽에서는 소비자단체들을 통해 분유나 케첩, 아이스크림 같은 구체적인 품목별 가격감시 활동도 재개되는 분위기다.
물가 상승은 구성원 전부에게 영향을 미치지만, 취약계층부터 가장 먼저, 가장 크게 타격을 입는다. 정부가 물가 상승의 고통을 막기 위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가장 큰 이유다.
하지만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다. 식당과 공장을 윽박지르고, 여차하면 주먹이라도 꺼내들 듯이 굴어도 오를 물가를 지체시키는 것 외에 효과는 없다. 진짜로 팔을 비틀고, 멱살잡이까지 했던 MB 정부조차 금반지를 빼는 꼼수를 부리고서야 물가를 잡았다고 주장하는 데 그쳤다.
이호준 경제부 차장 hjl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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