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표의 과학 한 귀퉁이] 생명의 무게
가을걷이가 끝난 휑한 논, 격자 꼴 따옴표로 남은 벼 그루터기에 연한 새순이 돋았다. 이울어 가는 가을볕이 뿜어내는 빛 알갱이는 지난 푸르름을 되살리기에는 충분치 않지만 짝짓기에 바쁜 하루살이 날갯짓을 북돋우기엔 모자람이 없는지 양지바른 곳에선 날것들이 사뭇 분주하다. 하루살이의 한 생애라야 고작 며칠이고 일년생 벼도 두 계절을 넘기지는 못하지만 그들의 삶의 무게가 30년이 한 세대인 인간의 그것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인간처럼 벼나 하루살이에게도 부모가 있고 그 부모의 부모가 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에 그렇다. 그 부모의 위쪽 끝은 대체 어디에 머물게 될까? 정확한 시기나 모습, 그 역사는 짐작하기 쉽지 않지만 확실한 것은 생명의 대물림은 그 어떤 생명체에서도 단 한 번의 끊김이 없었다는 점이다. 그것을 잊으면 안 된다. 슬슬 과거로 걸음을 떼보자.
인간을 포함한 포유동물은 과거 어느 날 지느러미에 뼈와 근육을 단장한 어류의 모습을 띠고 있었다. 미국 시카고 대학의 고생물학자 닐 슈빈은 북극 엘즈미어섬에서 물고기와 육상 사지동물의 중간 단계인 ‘틱타알릭’을 발견했다. 발이 있는 이 물고기는 땅 위로 배를 끌어올린 뒤 거침없이 육지로 올라왔다. 사정이 이렇다면 우리 조상은 한때 물고기 모습을 하고 있어야 옳다.
수족관이나 어항 속 물고기의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자. 지느러미를 노처럼 써서 목이 찰싹 달라붙은 몸을 통째로 움직이는 물고기에게는 몸의 기둥인 척추와 주변을 살피고 근육의 움직임을 관장하는 신경계가 포진한다. 몸 가운데를 소화기관이 가로지르고 감각기관이 운집한 머리 반대편 끝에 배설기관이 자리한다.
이런 물고기의 기본 몸 얼개는 인간과 하나도 다를 바 없다. 그전에는 오징어나 지렁이처럼 무척추동물들과 공통 조상을 가진 적도 있었을 것이다. 상상하긴 어렵지만 세포 하나가 전부인 시절도 있었음에 틀림없다. 고생물학자들은 공통 조상에서 식물과 동물 계통이 나뉜 때가 약 15억년 전이라고 생각한다. 그즈음이라면 벼나 하루살이, 인간 모두 하나의 조상을 가졌어야 옳다. 그 조상으로부터 15억년이 지난 지금 어떤 인간 하나가 마찬가지로 15억년을 어찌어찌 살아온 먼 친척인 벼의 그루터기와 하루살이 날개를 움직이는 근육세포 안의 미토콘드리아를 떠올리는 중이다. 그러니 지금 살아 있는 생명의 무게는 모두 동등하다. 벼의 15억년이나 그만큼의 세월이 새겨진 200여종류의 인간 세포, 하루살이 근육세포 간 다름은 없는 것이다. 최초의 생명체가 탄생했던 아득한 시절의 기억은 까마득하다. 대신 우리에게 가까운 동물의 조상 화석이 발견된 얘기로 화제를 돌려보자.
2020년 캘리포니아 대학 스콧 에번스는 가장 오래된 좌우대칭 동물의 화석을 발견했다는 연구 결과를 미 과학원 회보에 발표했다. 이들 연구팀은 동물의 화석이 대량으로 발견된 캄브리아기 이전의 생명체가 묻힌 호주 남부 플린더스산맥 사암층에서 연구를 진행했다. 그곳에선 해파리처럼 부드러운 몸통을 가진 다세포 동물의 화석이 대량으로 발견되었고 에디아카라 생물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선캄브리아기를 대표하는 생명체를 만날 수 있는 귀한 자원이다.
최초의 동물로 알려진 해면은 몸 얼개가 무정형이지만 해파리는 방사대칭이다. 하지만 몸통을 둘러싼 근육을 수축하여 해파리는 위아래로 움직일 수 있다. 에디아카라에서 좌우대칭인 몸통을 가진 화석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생물학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닐까?
좌우대칭형으로 설계한 몸통을 가진 생명체는 바다와 육상을 통틀어 전체 동물의 99% 이상이다. 좌우대칭은 빠른 움직임을 보장하는 진화적 참신성이었다. 러시아 동물학자 베클레미셰프는 일찍이 직선 운동이 갖는 진화적 이점이 좌우대칭 동물의 탄생을 이끌었다고 단정했다. 앞으로 나아가는 물체는 물속에서 반대 방향의 저항을 받는다. 이때 무정형인 해면은 몸이 겪는 항력의 불균형 탓에 빙빙 돌면서 앞으로 나가지 못할 것이다. 해면이 고착 생활을 선택한 이유다. 한 평면을 중심으로 좌우가 대칭인 생명체들은 직선 움직임뿐만 아니라 방향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도 있다. 기동력을 얻은 생명체가 물에서 뭍으로 올라와서도 여전히 그 몸통 설계를 바꾸지 않은 이유다. 중요한 것은 절대 바뀌지 않는다. 생명은 단절이 없고 식물은 태양을 향해 위로 동물은 먹이를 쫓아 앞으로 간다.
김홍표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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