냄새를 맡지 못했다, 기적이었다

한겨레 2023. 11. 1.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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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 한국사회]

게티이미지뱅크

[똑똑! 한국사회] 양창모 | 강원도의 왕진의사

할머니의 침대 머리맡에는 당신의 머리 색깔처럼 하얀 먼지가 내려앉은 조화 화분이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우리 방문의료진이 할머니께 인사를 건네며 말했다. “어머나, 꽃이 너무 이쁘다! 어머니 마음처럼 이쁘게 피었네.” 그 말에 할머니가 웃었다. 하지만 웃는 것도 참 힘들어 보였다. 그때 나는 몰랐다. 그 웃는 얼굴 속에 얼마나 많은 슬픈 생각들이 왔다 가는지를.

할머니가 내게 말했다. “걱정이야.” (어떤 게요?) “이러고 있는 거. 오래가면 안 되는데 너무 오래갈 거 같애. 아들한테도 미안하고 나도 힘들어. 그냥 빨리 끝났으면 좋겠어.”

암세포 때문에 빈혈 수치가 정상의 절반도 안 되던 할머니는 기력이 없어 말 한마디 할 때마다 숨을 골랐다. 그 말소리조차 할머니 입에 귀를 바짝 대야 겨우 들렸다.

시골집에서 혼자 살던 할머니는 암 말기가 되면서 점점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시내에 혼자 사는 아들이 자신의 집으로 모셨지만 일주일 넘게 음식을 입에 안 댔다. 겨우 물만 마셨다. 뭘 먹으면 대변이 나올 텐데 그걸 아들이 처리한다고 생각하니 굶어서라도 그 상황을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계속 피할 수는 없다. 할머니에게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도망칠 수 없는 현실로부터 유일하게 도망갈 수 있는 출구가 죽음인 듯했다. 그래서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고 싶었던 걸까. 손도 대지 않고 물려놓은 밥상은 다가올 죽음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지금의 삶에 대한 저항으로 느껴졌다.

한국 사회는 한 사람에게 죽음 말고는 다른 선택을 내놓지도 않으면서 죽음을 선택해서는 안 된다고 끊임없이 말한다. 나도 할머니에게 그렇게 말했다. 균열된 제도는 그 틈새에 사람을 던져 놓고는 틈새에 끼여 터져 나오는 비명은 듣지 않는다.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을 때 선택하는 것이 죽음이라면 그 죽음을 선택이라 말할 수 있을까.

“내가 정말 비위가 약해요. 그래서 내가 어머니 간병을 해야겠다 마음먹으면서도 제일 걱정된 게 대변 처리였어요. 그걸 어떻게 처리하나. 똥 기저귀를 보면 울렁거리지 않을까 걱정됐어요. 오죽하면 종교도 없는 내가, 잘할 수 있게 해달라 속으로 기도를 했을까.” 배변 처리는 아들에게도 고통이었다.

집에 와서 얼마 뒤부터 할머니는 잘 때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막상 아픈 데가 없는지 물어보면 없다고 했다. 참는 거였다. 하지만 끙끙거리는 횟수는 점점 더 많아졌다. 아들을 설득해 호스피스 병동으로 모셨다. 하루 최소 13만원이 드는 간병인을 쓸 형편이 안 되었던 아들은 결국 입원 뒤에도 할머니 간병을 해야 했다.

“이상한 게 막상 어머니 똥을 닦아내는데 냄새가 하나도 안 나요. 신기하게도. 나랑 같은 병실에 있는 간병인들이 다른 환자들 똥 기저귀 처리할 때도 보거든요. 그럼 분명 냄새가 나! 그러니까 내 코가 이상한 건 아니야. 근데 이상하게 어머니 똥에서는 냄새가 안 나는 거야. 난 그게 정말 기적이라고 생각해요.” 나는 안다. 아들의 기도를 하느님이 들어줘서가 아니고 그 기도의 간절함이 기적을 불러왔다는 것을. 기적은 신의 손을 빌려 사람이 하는 일. 기적의 싹이 움트는 곳은 신의 손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다.

한국의 노인들 4명 중 1명은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2017년 노인인권종합보고서). 하지만 그 책임은 결코 가족에게 있지 않다. 가족들은 그나마 있는 책임보다도 더 무거운 짐을 평생 짊어지고 살아간다.

“장례식장에서 어머니 유골함 들고나올 때 다른 사람들은 삼, 사십명씩 따라 나오는데 나는 그냥 혼자 나왔어요. 찾아오는 사람이 거의 없으니까. 어머니께 죄송했지. 그게 제일 힘들더라고. 그래도 지금은 마음이 편해요. 내 침대 머리맡에 어머니 영정 사진을 가져다 놨거든. 그 사진을 보면 지금도 내 옆에 살아 계신 것 같아.” 그리 말하며 아들은 웃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모른다. 저 웃는 얼굴 속에 얼마나 많은 슬픈 생각들이 왔다 가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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