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정기술’ 결과도 따뜻하려면 현지의 필요 제대로 파악해야

한겨레 2023. 11. 1. 18:5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나자바(Nazava) 페이스북 갈무리.

[왜냐면] 김예원 | 연세대 물리학과 2학년

적정기술은 사회의 정치·문화·환경적 조건을 고려해 만드는 기술로, 쉽게 말하자면 인간의 삶의 질을 향상할 수 있는 따뜻한 기술이다. 미국 적정기술센터(NCAT)의 정의를 보면, 적정기술은 지역·문화·경제적 조건과 공존 가능해야 하고, 지역민에 의해 유지·작동이 가능해야 한다. 즉, 기술을 이용할 사람과 상황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매일 무거운 물통을 들고 물을 길어오던 아프리카 어린이들의 수고를 덜어주기 위해 바퀴 형태의 물통을 굴려 쉽고 빠르게 운반할 수 있도록 한 ‘큐 드럼’, 오염된 물을 식수로 사용하던 제3세계 국가 사람들을 위해 저렴한 빨대 하나로도 오염된 물을 음용 가능한 수준까지 정수하는‘라이프 스트로’는 적정기술의 대표 사례다.

그런데 이 아름답고 따뜻한 기술이 삶의 질을 늘 향상시키는 건 아니다. ‘플레이 펌프’는 몇 년 전까지 우리나라 놀이터에서도 쉽게 볼 수 있었던 회전 놀이기구에서 착안해 남아프리카 지역과 모잠비크에 공급된 물 펌프다. 아이들이 놀이기구를 돌리고 놀면 지하수가 끌어올려져 탱크에 채워지는 방식으로 디자인했다. 물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는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에 혁신적인 도움을 줄 것이라는 기대를 받으며 1500여 대의 플레이 펌프가 이전에 사용하던 손 펌프를 대신해 아프리카 곳곳에 설치됐다.

그러나 아이들은 지나치게 무거운 플레이 펌프를 가지고 놀지 않았고, 물을 길어야 했던 여성들은 이 기구를 움직일 힘이 부족했다. 결국 이 사업은 실패로 막을 내렸고, 마을 사람들이 플레이 펌프를 버리고 다시 손 펌프로 돌아왔다. 적정기술로 도움을 주겠다는 열정이 가득했던 플레이 펌프는 실패한 적정기술의 대표 사례로 남게 됐다.

플레이 펌프뿐만 아니라, 많은 적정기술이 따뜻한 성공보다는 차가운 실패로 끝을 맺고 있다. 대부분 현지에 대한 이해와 배려 부족이 가장 큰 문제였다. 현대 적정기술의 선구자인 폴 폴락은 이러한 현실을 보며 “적정기술은 죽었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그렇다면, 적정기술의 따뜻함을 되살리기 위해서는 어떤 치료법이 필요할까?

필자는 고등학생 때 과학 실험 동아리에서 오염된 물을 생활용수로 사용하는 인도네시아의 한 마을에 전달하기 위해 물 필터 프로젝트를 진행한 적이 있다. 수업 시간에 배웠던 지식과 조사한 기술을 바탕으로 직접 디자인·실험·제작하고 부족한 비용은 투자까지 받았다. 처음에는 이미 검증된 필터 기술에 착안해 필터를 제작하려고 했지만, 마을의 기후, 사회·경제적 상황 등에 맞게 실험과 디자인 수정을 반복해야 했다. 기술이 아무리 좋아도, 기술을 사용할 사람과 상황에 맞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적정기술은 기술 그 자체보다 기술을 이용할 사람과 상황에 대한 이해가 우선임을 깨달았다.

다양한 실패를 발판 삼아, 적정기술의 동향도 이전과는 달라지고 있다. 특히 적정기술의 지속성을 유지하기 위해 이전의 원조나 기부의 형식을 벗어나, 현지의 지불 능력을 고려한 소비 형식으로 나아가고 있다. 사회적 기업의 형태로 시장 안에서 자생하는적정기술도 등장했다. 인도네시아의 나자바 플라스틱 정수 필터는 네덜란드 출신의 자원봉사자 리셀로트 히데릭이 오염된 우물이나 지하수로 고통받는 주민이 깨끗한 식수를 쉽고 저렴하게 이용할 방법을 고안한 것이다. 활성탄은 현지에서 구하기 쉬운 코코넛 껍질을 이용하고, 필터 외부는 저렴한 세라믹으로 구워냈다. 일반 식수를 이용하는 비용보다 87.5% 이상 저렴한 가격을 내세워 시장에서 살아남았고 무인 자동화 시스템 구축, 현지 판매 인력 고용 등을 통해 현지 일자리 창출에도 기여하는 사회적 기업으로 성장하고 있다.

가장 따뜻하고 아름다운 기술이라고도 불리는 적정기술은 개발 과정에서 현지의 필요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 결국 외면당한다는 한계를 갖고 있다. 하지만 첨단 기술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다는 명확한 가치도 갖고 있다. 따라서 적정기술의 진정한 가치가 빛나려면, 이론이나 이상보다는 현실에 집중해 실현 가능한 기술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 충분한 사전 조사와 의사소통을 통해 현지의 수요를 파악해 적합성을 고려하고, 꾸준한 현지 교육과 평가, 피드백과 개선을 통해 적정기술의 지속성을 높여야 한다. 기존의 한계를 극복하고, 실현 가능성과 적합성, 지속성의 삼박자를 모두 갖춘다면, 적정기술은 그 진정한 따뜻함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