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칼럼] 대통령은 숙였는데 野는 뻣뻣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전술'이 달라졌다. 항상 야당을 향해 당당함을 넘어 오만해 보였던 윤 대통령이 더불어민주당에 협조를 구하고, 부탁도 했다. 임기 내내 단 한번도 만나지 않을 것처럼 거리를 뒀던 이재명 대표와는 국회에서 첫 회동을 가졌다. 사실상 윤 대통령이 국회로 찾아가 이 대표를 만나는 모양새가 된 것이다.
당장 윤 대통령이 '달라졌다'는 평가가 쏟아졌다. 윤 대통령의 변화를 극명하게 드러낸 계기는 내년도 정부 예산안 시정연설이다. 윤 대통령으로서는 3번째 국회 시정연설이었다.
윤 대통령의 첫번째 국회 시정연설은 취임 6일 만인 지난해 5월 16일 59조 4000억원 규모의 추가경정예산안 설명이었다. 윤 대통령은 당시 코로나19 팬데믹 위기를 짚으며 "(추경에는) 소상공인에 대한 손실보상과 서민 생활의 안정을 위한 중요한 사업들을 포함하고 있다"며 "민생 안정이 그 어느 때보다 시급하다는 점을 고려해 추경이 이른 시일 내에 확정될 수 있도록 국회의 협조를 간곡히 부탁드린다"고 호소했다. 윤 대통령은 민주당의 상징색인 파란색과 비슷한 '하늘색 넥타이'를 착용하며 간접적으로 협치 의사를 드러냈고, 민주당은 팻말 항의 등 없이 윤 대통령과 인사를 나눴다. 그러나 불과 5개월 여 만에 분위기는 급랭했다. 지난해 10월 25일 윤 대통령의 2번째 국회 시정연설은 민주당의 전면 불참 속에 이뤄졌다. 헌정 사상 최초의 시정연설 거부였다. 사전환담도 이 대표 등 민주당 지도부가 불참해 반쪽으로 진행됐다. 이유는 윤 대통령의 미국 순방 중 불거진 '비속어 논란'이었다. 윤 대통령이 국회와 야당을 겨냥해 '이 XX'라고 한 표현이 문제가 됐다. 결국 639조원에 이르는 한 해 예산을 설명하는 시정연설 자리는 여당으로만 채워졌다. 이후 정치권에서 '협치'라는 단어는 사라졌다. 윤 대통령과 민주당의 대립은 1년 가량 평행선만 달렸다.
그 팽팽한 긴장을 먼저 끊어 낸 것은 윤 대통령이었다. 윤 대통령은 2024년도 정부 예산안 시정연설에 야당과의 협치 시그널을 담았다. 시정연설 전 가진 사전환담에서 처음으로 이 대표와 만났다. 다자 간 회동이었으나 윤 대통령 취임 1년 6개월 만에 이뤄진 공식 회동이었다. 연설 중에도 이 대표의 이름을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보다 먼저 호명했다. 윤 대통령은 시정연설 서두를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김진표 국회의장님, 김영주·정우택 부의장님, 또 함께해주신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님, 이정미 정의당 대표님,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님, 홍익표 민주당 원내대표님, 윤재옥 국민의힘 원내대표님, 그리고 여야 의원 여러분"이라고 시작했다.
통상 여야 순으로 호명하는 관례를 깨면서까지 이 대표를 예우한 것이다. 윤 대통령은 지난해 10월 시정연설에서는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김진표 국회의장님과 의원 여러분"이라고만 발언했다.
윤 대통령은 또, 여러 차례 국회에 초당적 협조와 관심을 당부했다. 총 7차례 국회를 언급하고, 각각 5번씩 '협조'와 '부탁'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협치에 방점을 찍었다. 지난 연설에서 '협조'와 '부탁'이 단 1번씩만 등장했던 것과 달랐다. 예산을 거론할 때 항상 언급하던 전임 정부의 '방만 재정' 책임론도 없었다.
연설이 끝난 뒤에도 민주당 의원들을 사이를 두루 다니면서 일일이 악수를 나누고 인사했다. 연설만 하고 용산 대통령실로 돌아간 것도 아니고, 여야 원내대표·상임위원장단과 간담회에 이어 오찬까지 함께 하며 상당한 시간을 할애했다. 윤 대통령은 "국회는 오늘로 3번째 왔지만, 상임위원장들과 다 같이 있는 것은 오늘이 처음인 것 같다. 많은 말씀을 잘 경청하고 가겠다"면서 "국회에 와서 우리 의원님들과 또 많은 얘기를 하게 돼 저도 취임 이후로 가장 편안하고 기쁜 날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또 "우리가 초당적, 거국적으로 힘을 합쳐서 국민의 어려움을 잘 이겨내고 미래 세대를 위해 새롭게 도약할 수 있도록 모두 힘을 합쳐야 할 때"라고 말했다. 간담회를 마치면서도 "여러분들이 아까 간담회 때 하신 말씀은 제가 다 기억했다가 최대한 국정에 반영하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윤 대통령의 태도가 변화한 근간에는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참패가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여당은 애써 '용산 책임론'을 외면하고 있지만, 윤 대통령으로서는 뼈아픈 첫 패배였다. '국민은 늘 옳다'며 자세를 낮추고 변화를 시사한 것을 시정연설로 구체화한 셈이다. 고작 연설 한 번으로 대통령의 꽉막혀 있던 소통 방식이나 이념적 사고, 인사·통치 스타일까지 혁신하고 쇄신한 것으로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되레 아직 부족하다고 채찍질을 해야 할 것이다. 앞으로 얼마나 꾸준히, 얼마나 국민이 원하는 방향으로 윤 대통령이 움직일지를 지켜봐야 한다.
'신사협정'까지 맺은 민주당은 국회를 찾은 윤 대통령을 향해 손팻말 침묵시위를 벌였다. 팻말·고성·야유 등을 금지한 본회의장이나 상임위원회 회의장이 아니라며 스스로 정당성을 부여했지만 신사협정은 무색해졌다. 모 의원은 자신의 SNS에 "시정연설 후 대통령이 악수를 청하길래 '이제 그만두셔야죠'라고 화답했다"고 으시대기도 했다.
윤 대통령은 협치 냄새만 풍겼을 뿐이지만, 국민들 눈에는 정체돼 있는 야당에 비해 충분히 비교우위를 점했다. 총선이 바로 코앞이다. 먼저 변화하는 쪽이 민심을 잡을 것이다. the13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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