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싱 여제' 남현희, '여제' 칭호 유래는 착각?

이솔 기자 2023. 11. 1.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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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지금은 '전청조'라는 인물과 연관되어 사회적으로 굉장한 이슈를 만들어내고 있는 남현희.

남현희에게 펜싱 여제라는 칭호가 붙기 시작한 것은 2012 런던 올림픽이다.

아쉽게도 2012 런던 올림픽에서는 개인전 4위, 단체전 동메달 등으로 '펜싱 여제'라는 칭호를 가져올 수 있던 금메달 도전에는 실패했으나, 남현희는 이후로 '펜싱 여제'라는 칭호와 어불어 우리나라 펜싱의 최강자로 군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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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펜싱 국가대표 남현희, 남현희 SNS 계정

(MHN스포츠 이솔 기자) 비록 지금은 '전청조'라는 인물과 연관되어 사회적으로 굉장한 이슈를 만들어내고 있는 남현희.

그 남현희는 우리에게 '펜싱 여제'로 알려져 있다. 그는 왜 '펜싱 여제'로 불리게 됐을까?

사실 남현희의 '펜싱 여제'라는 별명은 숙적의 별명을 따온 것이다.

남현희가 '여제'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발렌티나 '베잘리'에 이어서다. 과거 남현희는 작은 체구로 인해 '땅콩 검객', 혹은 '미녀 검객'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그 대신 세계 최강자로 꼽히던 발렌티나 베잘리(이탈리아)가 펜싱계의 최강자로 '펜싱 여제'라는 별명을 듣고 있었다.

2002년 22세의 나이로 부산 아시안게임에서 플뢰레 단체전 금메달을 획득하며 처음으로 이름을 알렸던 남현희는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플뢰레 개인전 8강에 오르며 세계에 자신의 이름을 알린다.

이어 세계선수권 대회 금메달(2005 라이프치히), 2006 도하 아시안게임 개인-단체 금메달을 획득하는 등, 남현희는 '아시아 최강'으로써의 입지를 점점 굳혀 갔다.

특히 아시아 선수권 대회에서는 2013년을 제외하고 2009년부터 2017년까지 모두 금메달을 획득하는 진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아시안게임에서도 4개 대회(2002-2006-2010-2014)연속 금메달을 획득한, 국내 펜싱을 대표하는 선수다. 은퇴 직전인 지난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서도 단체전 동메달을 따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우기도 했다.

남현희에게 펜싱 여제라는 칭호가 붙기 시작한 것은 2012 런던 올림픽이다. 베잘리가 건재했던 터라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국내 언론들은 갑작스럽게 남현희에게 '펜싱 여제'라는 칭호를 붙이기 시작했다.

다만 당시 세계랭킹 1위도 베잘리였고, 베잘리 또한 남현희와 같은 대회에서 뛰었던 만큼, '펜싱 여제'에 어울리는 선수는 베잘리였다. 심지어 당시 개인전에서는 베잘리에게 패배하며 메달 획득을 눈앞에서 놓치기도 했다.

정황상 국내 언론들이 베잘리의 '펜싱 여제'라는 칭호를 남현희의 것으로 착각했다고 밖에 볼 수 없었다. 이전까지는 지난 2011년 연합뉴스만이 한국 펜싱의 '여제' 라는 표현을 단 한 차례 사용한 것이 전부다.

아쉽게도 2012 런던 올림픽에서는 개인전 4위, 단체전 동메달 등으로 '펜싱 여제'라는 칭호를 가져올 수 있던 금메달 도전에는 실패했으나, 남현희는 이후로 '펜싱 여제'라는 칭호와 어불어 우리나라 펜싱의 최강자로 군림했다.

특히 그가 세운 펜싱 국제대회 개인전 최다 우승 기록(총 18회)는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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