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존 문법 깬’ 나주축제…혁신 신호탄 쐈다
‘혁신·흥행’ 두 마리 토끼 잡은 나주 통합축제 원년
일각, 혁신·변화를 빙자한 ‘겉멋 축제’ 전락 우려도
(시사저널=정성환 호남본부 기자)
전남 나주시의 첫 통합축제인 '2023나주축제, 영산강은 살아있다'가 열흘 간의 대장정을 마무리했다. 지역사회에선 올해 축제에 대한 평가를 두고 호불호가 갈린다. 그럼에도 '혁신축제'의 신호탄을 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이번 나주축제가 기존 축제를 통합하고 확장한 새로운 형식의 축제로 역사를 새롭게 썼다는 것이다. 흥행은 덤이었다. 열흘 간 누적 방문객 27만 명을 기록했다.
그동안 주민들의 예술적인 안목과 문화 향유에 대한 욕구는 높아지는데 정작 지역에서 준비한 축제는 그 안목을 따라가기에 역부족이었다. 그러다보니 축제가 끝난 뒤에는 차라리 안 한 것보다 못한 축제라는 혹평이 부록처럼 따라 붙었다. 올해 축제 또한 맹탕축제 논란 등에서 자유롭지 못한 모양새다. 1회성이 아닌 지속가능 통합축제를 선언한 나주축제가 풀어야 과제는 많다.
'축제 3대 감초' 트로트·야시장·각설이 퇴출
올해 축제는 기존의 '축제 문법'과 달랐다. 해마다 치러온 연례행사의 형식적 틀을 벗어났다. 좀처럼 극복되지 못했던 지역 고유문화와 무관한 외부 이식(移植)성 행사를 과감하게 퇴출했다. 전국 축제장의 감초격인 트로트·야시장 판·각설이 무대가 사라진 것이 대표적이다. 그간 나주의 독창적인 문화의 특징이 사라진 대신 전국적으로 박제화된 축제 행사가 정착되고 있었던 것은 지역축제에 대한 피로감 누적과 함께 한계로 꼽혔다. 일부에선 이를 전국적 축제권력과 지역 기득권세력(?)이 결탁한 나눠먹기는 대표적인 병폐로 거론됐다.
대신 터줏대감들이 떠난 빈자리를 지역민들이 접하기 쉽지 않은 문화·예술 공연이 채웠다. 남도의 젖줄인 영산강 일원에서 열린 이번 축제에선 마치 예술의 전당을 옮겨 놓은 것처럼 고품격 문화·예술 공연을 연일 선보이면서 예향 나주의 면모를 과시했다. 올해를 '영산강 비엔날레' 출범의 해로 불러도 손색이 없다는 후한 평가까지 나온다.
시간 폭도 확대됐다. '아름다운 영산강에서 보낸 10일'이라는 부제로 마한, 고려, 조선, 근대로 이어지는 2천년의 유구한 역사문화도시인 나주만의 볼거리, 즐길(체험)거리, 먹거리를 다채롭고 풍성하게 선보였다. 특히 나주가 시대별로 가장 번영했던 장면을 각종 공연과 퍼포먼스로 창작해 축제 기간 하루도 쉬지 않고 선보이며 시민과 관광객이 수준 높은 문화 공연을 폭넓게 향유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했다.
54척 조운선이 영산강을 힘차게 가르는 개막 퍼포먼스와 3차례 가을 밤하늘을 화려하게 수놓은 불꽃쇼는 이번 축제 최대 볼거리로 관광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줬다. 특산물을 가득 싣고 만선의 기쁨을 누리며 강을 가로질러 도착하는 모습을 재현한 조운선 퍼포먼스는 서남권 물류의 중심지였던 영산포의 부활, 살아있는 강이자 바다로 나주의 번영을 이끈 영산강의 새로운 르네상스를 예고했다.
공간도 넓어졌다. 그동안 주 무대를 중심으로 치러왔던 행사를 구도심과 혁신도시 등 나주 전역으로 확대했다. 나주의 역사적, 문화적으로 의미있는 공공장소 열 곳에 설치된 '영산강국제설치미술제 2023'도 돋보였다. 나주에 산재한 과거의 유산들은 단지 옛 추억의 대상이 아니라 지금 여기 생동하는 문화예술의 장으로 새롭게 되살아난 것이다.
전시를 총괄한 백종옥 예술감독은 "나주에 산재한 과거의 유산들은 단지 옛 추억의 대상이 아니라 지금 여기 생동하는 문화예술의 장으로 새롭게 되살아나야 한다"며 "이번 프로젝트는 품격 있는 예술의 도시, 문화콘텐츠를 통한 재생의 도시, 활력 넘치는 축제의 도시를 조성하는 데 크게 이바지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압도적 성과'는…나주 역사문화의 재발견
이번 축제를 통한 나주 역사문화의 재발견은 압도적 성과다. 왕건과 버들낭자의 첫 만남을 그린 창작뮤지컬 '왕건과 장화왕후'를 비롯해'마한소도제', 미디어아트 '영산강 아리랑', '천연염색패션쇼', '왕건-견훤 원한 굿풀이', '홍어장수 문순득 표류기', 전통춤·연희 '나주목관부무', 근대무용 '나주시내 딴스홀', '나주학생항일운동 현대무용' 등 각종 무대공연은 향후 나주를 대표하는 문화·예술·공연콘텐츠로 발전 가능성을 아낌없이 보여줬다. 적게는 수억에서 수십억원의 혈세가 들어간 축제가 끝나면 행사 의미는 불꽃놀이와 함께 사라지고 대신 공허함만 남았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지자체가 거액의 혈세를 들여 매년 축제를 여는 것은 지역민의 문화향유 기회 부여와 함께 지역에 산재한 역사문화 콘텐츠를 개발하고 문화예술로 발전시키면서 산업과 관광으로 연계시키겠다는 목적에 방점이 찍힌다.
윤병태 나주시장이 "통합축제를 통해 선보인 수준 높은 공연은 나주의 지속가능한 문화자산이자 시민의 문화 향유 콘텐츠가 될 것"이라고 강조한 것도 이 같은 취지로 읽힌다. 흥청망청 먹고 마시는 1회성 소비 위주 행사에 그치지 않고 보다 축제의 생산성과 향토문화 발전 차원에서 새롭게 방향을 모색해야 한다는 주장과도 궤를 같이 한다.
기획력은 탁월했다. 전남 축제판을 뒤흔들 킬러 콘텐츠가 즐비했다. 이번 축제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개별적, 산발적으로 각기 진행됐던 군소 축제·행사를 하나로 묶어 시도한 나주의 첫 '통합축제'였다는 점이다. 통합축제는 마한문화제, 천년나주목읍성문화축제, 나주농업페스타, 영산강국제설치미술제, 영산강전국요리경연대회, 시민의 날 기념식 등을 통합하거나 연계해 개최됐다.
연일 수준 높고 진정성 있는 공연과 더불어 벽을 없앤 축제 주무대는 관람객으로부터 좋은 반응을 이끌어 냈다. 축제 무대는 기존 고정화된 틀에서 벗어나 매일 저녁 황홀한 영산강 낙조 풍경, 낭만적인 가을 밤하늘을 감상할 수 있는 친자연적인 공간으로 관람객들에게 힐링을 선사했다.
'상생 농업축제' 발돋움…돌아온 주인 농업인
지역 농업인이 객이 됐던 기존 축제 모습과는 달랐다. 나주농업페스타의 경우 통합축제와 연계해 농축산물 판매 부스를 운영, 농업 생산자와 관광 소비자를 직접 연결하는 상생의 농업축제로 발돋움했다. 고질적인 상 관행이 사라지고 클린 식문화를 선보였다.
관내 외식업체 11곳이 입점한 '영산강 카페테리아' 먹거리 부스는 철저한 위생 관리, 바가지요금 근절, 맛깔난 음식과 더불어 일회용 접시, 수저가 아닌 식당 식기를 손님들에게 제공하며 건강과 환경을 보호하는 새로운 축제 식문화를 만들어냈다. 열흘간 나주농업페스타존, 영산강카페테리아 부스 누적 매출은 4억7000만원으로 집계됐다. 나주 업체에서 생산한 부스와 검증된 맛집 입점, 부스 값을 무료로 제공한 대신 가격을 낮춘 결과다.
독선적 운영방식 논란도…"'개폼'만 잔뜩 잡은 축제"
하지만 일부 지역민의 반발도 거셌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게 없다''트로트가요제가 빠진 축제가 제맛을 잃었다' 등의 부실에 대한 비판이 축제 기간 내내 끊이지 않았다. 일각에서 제기된 지역정서를 외면한 독선과 독선에 의한 축제 운영방식을 두고 '겉멋 축제'로 전락할 수 있다는 우려는 결정적이었다.
비난의 화살은 남정숙 총감독과 장현우 나주시 문화예술특화기획단장을 향했다. 축제 담당부서장인 나주시 관광과장과 지역 문화예술을 관장하는 문화예술과장이 이번 축제 과정에서 '그림자'라는 별칭을 얻었다는 힐난은 뼈아픈 대목이다. 나주시 5급 사무관인 두 과장이 총감독과 문화예술특화기획단장의 보조 역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는 지적이다.
차제에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다는 팔걸이 원칙과 지역정서, 의견 반영 등을 맡은 행정 사이에 관계 정립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축제추진위원회구성 과정에서 최소한 위촉했어야 할 문화원장과 예총회장이 배제된 것도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다.
근본적인 문제는 비단 여기에만 있지 않다. 축제의 성격이 보다 확실하게 규정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지역 한 중견 언론인의 따가운 말이다. "18만여 원에 상당한 서울 특급호텔의 뷔페가 아무리 맛있다고 해도 그런 고액의 뷔페식당을 나주에다 차리면 손님이 있겠느냐. 나주축제는 나주의 정서와 수준에 맞는 축제가 되어야 하는데 '개폼'만 잔뜩 잡은 축제였다는 지적을 총감독과 (문화예술특화기획)단장은 기억해야 한다."
트로트 '금단현상'에 곤욕
전반적인 축제 운영의 미흡한 점도 아쉬운 대목이다. 비합리적인 운영이 시민 참여와 협력을 가로 막는 한 요인이 됐기 때문이다. 수십개의 행사가 단기간에 나주 전역에 걸쳐 진행되다보니 행사장 찾기에 어려움을 겪은 일부 시민들이 참석을 포기하기 일쑤였다. 주요 행사나 공연을 사전에 알 수 있는 통합시스템의 구축이 제대로 안 된 탓이다. 또 축제장이 광역화되다보니 열기와 긴장감이 떨어져 오히려 빈껍데기 맹탕 축제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무엇보다 익숙함과의 갑작스런 결별에 따른 지역민들의 상실감은 컸다. 주최 측은 행사 기간 내내 축제가 '제 맛을 잃었다' 등 금단현상에 따른 비판에 곤욕을 치렀다. 일부에선 지역정서를 도외시한 트로트에 대한 차별적 시각의 발로라며 저급문화 논쟁까지 꺼내들기도 했다.
"축제 개최 30여년 이래 올해처럼 나주통합축제를 두고 지역민의 여론이 갈린 해도 드문 것 같다. 매는 아무래도 행사를 집행한 주최·주관 측에 가해지는 양상이다. 주최 측이 '영산강은 살아있다'와 혁신을 모토로 내걸었지만 이를 뒷받침할 만한 알맹이가 없다는 등 크고 작은 불만이 나왔다. 그렇다고 나주축제에 가해지는 비판이 주최·주관 측에만 고스란히 돌려져야 하는 가에 의문이 든다. 전례 없는 호평과 격려도 많았다. 지역민에게 고급문화에 대한 향유 기회부여와 축제권력과 기득권 세력 간에 이권 카르텔의 원천 차단은 고무적이었다." 나주 한 예술인의 지적은 올해 나주통합축제의 공과 과를 요약하기에 족하다.
멈춤이냐 지속이냐…갈길 먼 '혁신·변화'
변화와 혁신의 공을 쏴 올린 나주통합축제가 멈춰 퇴행하느냐, 지속하느냐 여부는 오롯이 나주 시민의 몫으로 남았다. 남정숙 나주축제 총감독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남긴 글이다.
"단 한번의 혁신에 실패해도 10년 이상 지역문화는 퇴행을 걷고 회복하기 어렵다. 명징한 사례로 서울 동부 한 지역이 그렇다. 10년이나 됐지만 지역업자들에게 굴복한 거리축제는 10년이나 되었어도 여전히 트로트·야시장·각설이 등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혁신과 변화는 누구에게서가 아닌 시민 전체의 변화에 대한 열망과 개인의 이익이 아닌 거시적 발전 방향을 볼 수 있는 혜안 있는 자들의 강한 의지에 의해서 리딩해 나가야 한다. 외부인인 저는 단지 촉매일 뿐이다. 나주에 변화는 문화예술로부터 시작됐고 멈춰 퇴행하느냐, 변화와 혁신을 지속하느냐는 나주시민들의 몫이다. 힘들더라도 혁신을 지속하기 바란다. 성질이 급해서 참기 어려우시더라도 문화예술은 혁신하기 제일 좋은 가시적 도구다. 그러나 시간이 필요하다. 타협하고 봉합하면 예술은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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