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LB '2000승' 감독의 은퇴, 그리고 '명장'의 조건
베이커 감독은 휴스턴의 사령탑을 맡은 4년 동안 아메리칸리그 챔피언십시리즈(ALCS)에 4차례 모두 진출했고 2021~2023년 3년 연속 서부지구 1위를 차지했다. 2021~2022년 2년 연속 월드시리즈에 진출했고, 2022년에는 필라델피아 필리스를 4승 2패로 물리치고 월드시리즈 우승까지 일궈냈다. 올해에는 ALCS에서 텍사스 레인저스와 접전을 펼친 끝에 3승 4패로 아쉽게 졌다. 이어 '감독 은퇴' 소식을 알렸다.
베이커 감독은 MLB의 대표적인 '명장'으로 꼽힌다.
1968년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에서 MLB 선수 생활을 시작해 LA 다저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오클랜드 애슬레틱스를 거치며 1986년까지 19년 동안 외야수로 활약했다. 통산 2039경기 타율 0.278, 1981안타, 242홈런 1013타점 964득점 762볼넷 926삼진, 출루율 0.347, 장타율 0.432, OPS(출루율+장타율) 0.779의 성적을 남긴 뒤 지도자로 변신했다.
흥미로운 점은 역대 12번째이자 흑인 감독 최초의 '2000승' 대위업을 달성한 감독이지만, 월드시리즈 우승은 73세였던 지난해 처음 성공했다는 것이다. 70세를 넘기고도 젊은 선수들과 소통하고 베테랑 선수를 존중하며 '할아버지 리더십'을 발휘해 마지막 숙원을 풀어냈다. 그는 그 전에도 '명장'으로 불렸지만, 월드시리즈 제패를 통해 못다 이룬 꿈을 비로소 성취했다. 미뤄두었던 '명장 대관식'을 치른 격이었다.
야구 감독은 타순을 짜고, 작전 지시를 내리고, 코칭스태프와 선수들을 지휘해 훈련과 경기를 운영하는 등 아주 많은 일을 한다. 특히 다른 종목에 비해 엄청나게 많은 수의 사람을 다뤄야하는 자리다. 야구 감독을 영어로 '매니저'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뛰고 달리는 등의 몸을 움직이는 육체적인 업무를 직접 하지는 않는다. '최강야구'의 김성근 감독처럼 직접 펑고에 나서고 배팅볼을 던져주는 감독이 있지만 주업무는 아니다. 감독도 아주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 대부분 선수와 코치 생활을 거쳐왔기 때문에 운동과 코칭 능력을 갖추었지만, 육체보다 정신적인 일에 더 몰두한다. 무엇을 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선택이 감독에게 주어진 운명이다. 최종 결정권자의 그것과 똑같다.
야구 감독을 해군 제독, 오케스트라 지휘자와 함께 태어나서 한 번 정도는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직업이라고 한다. 부하들을 움직여 작전을 수행하고, 다양한 악기의 연주자들을 지휘해 훌륭한 공연을 펼치는 것처럼 야구 감독은 총체적인 힘을 모아 최선의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일을 한다. 긴박한 상황에서도 오롯이 혼자 최종 결정을 내리고 그에 따른 책임도 져야하는 자리다. 참모들의 의견을 청취하지만, 최종 결정은 감독의 몫이다. 그래서 한 팀에 감독은 한 사람만 두는 것이다. 선택과 결정에는 감독의 개성이 발휘되고, 그를 통해 명장 여부도 가려진다. 명장은 감독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지도자일 터이다.
레너드 코페트의 야구 교과서 '야구란 무엇인가'에 실린 '감독'에 대한 서술을 보자.
감독은 ▲선수의 기본 성격까지 개조할 수 없다 ▲선수의 기본 능력까지 바꿀 수 없다 ▲하프타임을 이용해 선수들을 분발하게 하는 미식축구처럼 선수들을 휘몰아쳐서는 안 된다 ▲새롭고 특별하고 기발한 작전을 만들어낼 수 없다 ▲경기장 밖에서 일어나는 행동까지 통제할 수 없다 ▲공을 가는 길까지 가르쳐줄 수는 없다고 전제한다.
이어 감독의 자질과 임무와 관련해 ▲감독은 선수들의 존경을 받아야 한다 ▲규율을 확립해야 한다 ▲성격이 다른 선수들에게 필요한 바를 파악하고 거기에 맞춰 다루어야 한다. 특히 특별대우를 받거나 특권을 가진 계층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 ▲선수 개개인의 능력을 파악해서 팀 전체에 최대 효과가 나오도록 활용해야 한다 ▲그리고 게임을 운영한다고 설명한다.
또한 감독이 존경받기 위해서는 ▲조금은 냉정한 인상을 풍기면서 야구에 대한 현명한 판단력과 공정성을 가져야 한다 ▲플레이에 대한 여러 상황을 순간적으로 파악하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 ▲기용할 수 있는 선수들이 갖춘 재능을 최대한 가동하고 실패 가능성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감독이 이와 같은 임무를 충실히 이행하고 모든 조건을 갖추면 '명장'이라고 할 수 있을까. 궁극적으로는 게임에서 많이 이겨야 명장의 칭송도 따라온다. 이러한 임무와 조건들이 경기에서 이기기 위한 과정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구단도 게임에서 이기기 위해 좋은 감독을 찾고 선임하며 이 같은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명장'을 가르는 제1덕목은 많은 승수인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감독이 아무리 훌륭한 덕목을 가진 지도자라고 해도, 유능한 선수를 거느리고 있지 않다면 승리도, 명장 반열에 오르는 것도 모두 불가능하다. 결국은 좋은 선수를 많이 보유한 팀의 감독이 많이 이기고, 명장이 된다. 무능한 선수들만 있다면 이길 수 없다. 그렇다고 명장이 곧 승장은 아니다. 제 아무리 뛰어난 감독도 언젠가는 하락 국면을 맞고 성적 부진 속에 퇴임하는 장면을 수도 없이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좋은 자질을 갖춘 감독이 유능한 선수들이 많은 팀에서 사령탑의 임무를 맡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 역시 현실이다.
해태(KIA 전신)와 삼성에서 10번이나 한국시리즈 우승을 일궈낸 김응용 전 감독이 KBO리그 역대 최다승(1554승) 감독이며 최고 명장이 아닐까. 해태 시절에는 9차례 진출한 한국시리즈에서 모두 우승의 영광을 안았다. 이어 SK(SSG 전신)에서 세 차례 우승한 김성근 전 감독이 1388승으로 최다승 2위에 올라 그 뒤를 잇는다. 정규시즌 1000승을 돌파한 사령탑은 김응용 김성근 감독, 단 두 명뿐이다. 두산에서 두 차례 한국시리즈 우승뿐 아니라 국가대표 감독으로도 각종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둬 '국민감독'으로 칭송받은 김인식 전 감독이 978승으로 3위다.
한때 '3김 시대'를 열었던 세 '명장'은 성적 부진에 허덕이던 한화의 사령탑을 맡았다는 공통점을 안고 있다. 감독 생활의 가장 마지막 임기를 한화에서 보냈다.
김인식 감독은 2006년 '괴물 신인' 류현진과 베테랑 송진우 등 투수, 김태균 이범호 등 타자들과 힘을 모아 한국시리즈 준우승을 차지하는 등 성과를 올렸다. 2004~2009년 6년 동안 한화를 이끌며 2005~2007년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 이어 김응용 감독이 2013~2014년 2년 동안 한화를 맡았으나 모두 9위로 떨어지며 하위권을 벗어나지 못해 '명장'의 이름에 오점을 남겼다. 2015~2017년 한화를 지휘한 김성근 감독은 첫 해 순위 경쟁을 펼치다가 6위에 그친 데 이어 2016년 7위에 머물렀고, 2018년 5월 22일 중도 퇴진했다.
KBO리그 최다승 감독 4~10위는 현대에서 네 차례 우승한 김재박(936승), 롯데에서 두 차례 정상에 오른 강병철(914승), 우승 없이 두산과 NC를 지휘한 김경문(896승), OB(현 두산)와 삼성에서 한 차례씩 우승한 고(故) 김영덕(707승), 2011~2014년 한국시리즈를 4연패하며 '삼성 왕조'를 이끈 데 이어 LG에서 사령탑을 지낸 류중일(691승), 7년 연속 한국시리즈 진출과 세 차례 우승으로 '두산 왕조'를 이끌다가 최근 롯데 지휘봉을 새로 잡은 김태형(645승), SK에서 시작해 KIA에서 우승의 영광을 누리고 KT의 창단 초석을 다진 조범현(629승) 순이다. 10명의 감독 가운데 강병철 류중일 조범현 감독을 제외한 7명이 '김씨'다.
이 가운데 김경문 감독은 한국시리즈 정상에 서지 못한 유일한 지도자다. 그렇다고 그를 '명장'의 반열에서 제외해야 할 이유는 없다. 두산에서 상위권 성적을 유지했고, NC 창단 감독으로 신생 구단의 빠른 안착과 성장을 이끈 것은 물론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 한국 야구 첫 금메달을 획득했다. 베이커 감독처럼 언젠가 한국시리즈 우승의 기회를 다시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김태형 감독이 '야인' 1년 만에 감독직에 복귀했고, 류중일 감독은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따내며 대회 4연패를 이끈 데 이어 오는 11월 도쿄에서 열리는 아시아 프로야구 챔피언십(APBC) 2023에서도 지휘봉을 잡는다. 기회는 열려 있다. 감독직에 연령 제한이 있는 것은 아니다.
박정욱 기자 star@mtstar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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