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야유 없는 시정연설 관전기

원종진 기자 2023. 11. 1.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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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도보다 중요한 건 '내용 있는' 정치 논쟁

 
"안타까운 것은 정치 상황이 어떻더라도 과거 노태우 대통령 시절부터 지금까지 30여 년간 우리 헌정사에서 하나의 관행으로 굳어져 온 것이 어제부로 무너졌다는 겁니다."
- 2022년 10월 26일, 야당 시정연설 보이콧 다음날 출근길 윤석열 대통령

'정부 예산안 편성 이유와 내용을 직접 설명해 드리고 의원 여러분의 이해와 협조를 구하고자 합니다.'라는 문구로 시작하는 대통령 시정연설은 1988년 노태우 대통령이 처음 시작했습니다. '시정(施政)'이라는 단어가 '정치를 베푼다'는 뜻으로도 해석되기도 해 '권위주의적'이라는 비판도 있지만, 독재정권에 신음해 온 우리나라 정치사에서 대통령 시정연설은 민주주의 제도화를 상징하는 여러 관행들 중 하나였습니다.

지난해 야당의 전면 보이콧으로 깨졌던 한국 민주주의의 이 관행은 어제(31일) 비로소 제자리로 돌아왔습니다. 오전 9시 40분 대통령이 국회 로텐더홀로 들어서던 순간, 야당 의원들은 '국정 기조 전환' '민생이 우선이다'라는 문구가 적힌 피켓을 들고 계단에 도열했고, 일부 의원들은 "윤석열 대통령님, 여기 좀 보고 가세요!"라고 소리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본회의장에서는 집단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올해 시정연설에서의 '신사협정'을 제안한 홍익표 원내대표는 본회의장으로 들어서는 윤 대통령을 맞이했고, 곧이어 이재명 민주당 대표도 윤 대통령과 웃으며 악수를 나눴습니다. 이재명 대표 비서실장인 천준호 의원 등이 연단으로 들어서는 윤 대통령 악수를 거부하기는 했지만, 여러 민주당 의원들은 친명ㆍ비명 가릴 것 없이 윤 대통령의 악수 제안에 화답했습니다. 그 뒤 27분간 진행된 윤 대통령 연설 중에는 야당 의원들의 야유나 명시적인 단독 행동은 없었습니다.
 

신사협정은 어떻게 맺어지게 되었나

악수나 야유와 같은 '그깟 제스처'가 뭐가 중요하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냉각'이라고 표현하기도 어색할 정도로 파국이었던 지금의 정국에서 여야 지도자들의 악수는 전시의 회담을 연상케 했습니다. 시작은 시정연설 일주일 전, 여야 원내대표와 국회의장 간 회동이었습니다. 지난주 화요일(24일), 홍익표 민주당 원내대표는 국정감사 대책회의 모두 발언에서 "본회의장과 상임위원회의장에 손팻말을 들고 가지 않겠다. 우리가 일종의 신사협정을 제안했고 여야가 합의했다"고 말했습니다. 홍 원내대표는 SBS와 인터뷰에서 제안 배경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홍익표 원내대표
사실 국회에서의 야유를 너무 불편하게 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국회 안에서 야유하는 게 우리나라만 하는 게 아니라 외국은 더 심하게 하는 경우도 있어요. 잘 아시는 것처럼 낸시 펠로시 하원 의장은 트럼프 대통령이 와서 연설했을 때 뒤에서 연설문 찢기도 했잖아요.

그렇지만 최근에는 조금 우리 국회 회의장 질서가 더 나빠진 것 같아요. 어떤 말이나 또는 이런 회의장 내의 여러 가지 피켓팅으로 인한 혼란스러움이 더 심화되는 경우가 있어서 '조금 이걸 한번 바로잡아야 될 때가 되지 않았나' 이런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제가 얘기했던 건 원래는 세 가지였어요. 첫째는 본회의장이든 상임위 장이든 손피켓을 안 하는 것. 두 번째는 대표 연설이나 또는 대통령 시정연설 때는 야유 하지 않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박수 치는 것도 좀 제한하자고 그랬어요. 본회의장에서 박수 치는 관행이 원래 없었거든요. 제가 초선 때는 본회의장에서 박수 치면 우리 선배 의원들이 막 뭐라고 그랬어요. 국회의원들이 자신의 당 대표나 또는 대통령을 위해서 물개 박수 치는 거 모양 별로 안 좋거든요 제가 보기에는. 그런데 박수까지 치지 말자는 건 여당이 조금 부담스러워했던 것 같고요.

양당 원내대표 간 물밑 교감이 이뤄지면서, 김진표 국회의장은 지난 10월 23일 국회의장-여야 원내대표 간 3자 회동 때 제안 사항들을 문서로 정리해 제시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하지만 물밑 교감이 뜬금없이 오갔던 것은 아닙니다. 양당 원내대표 간 합의 조율에 참여한 조경호 국회의장 비서실장은 SBS와의 통화에서 "그때가 마침 여당도 상대를 비방하는 플래카드를 걸지 않기로 발표한 다음 날이었다"라며 "여당도 상대를 비난하는 현수막을 제거하기로 했으니, 민주당도 선제적으로 대통령 시정연설 또는 상대 당 교섭단체 대표 연설 시 막말과 야유 또는 비난 피켓을 들지 않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국회의장 제안이 있었다"고 설명했습니다. 전시의 협상은 대개 한바탕 치열한 전투 뒤 전황이 고착됐을 때 진행되듯, 여야의 협정 뒤엔 강서구청장 재보궐선거 뒤 달라진 정치 환경도 자리하고 있었던 겁니다.
장외에서 다소 간의 소란은 있었지만, 어찌 됐든 이번 여야 원내대표 간 '신사협정'이 일정 부분 실현되면서 양당 원내지도자들은 소기의 정치적 성과를 얻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재명 대표 체포동의안 가결 뒤 극심한 당내 갈등 속에 취임한 민주당의 홍익표 원내대표는 168석에 이르는 거대 야당 의원들이 제안에 따라줌으로써 새 원내지도부의 권위를 일정 부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17% 넘는 큰 차이의 패배를 당한 뒤 '정치 복원', '민생 속으로' 메시지를 내고 있는 국민의힘 윤재옥 원내대표 또한 대통령이 1년 만에 국회 본회의장을 방문한 자리에서 외형이나마 복원된 협치의 틀을 보여줬습니다.
 

'말과 태도'보다 중요한 것

"쥐새끼 같은 장관! 마가렛 대처 코에 난 사마귀 같은 놈!"
a little squirt of a Minister. A slimy wart on Margaret Thatcher's nose!

다큐멘터리 영화 <Dennis Skinner: Nature of the Beast>의 주인공이기도 한 영국 노동당의 '13선 의원' 데니스 스키너는 무려 49년 동안 영국 하원 의원으로 재직하며 여러 폭언으로도 유명세를 떨쳤습니다. 지역구의 이름을 따 '볼소버의 야수'라고 불린 스키너 의원이 독보적이긴 하지만, 민주주의의 발상지라는 영국 의회에서도 의원들의 폭언 사례는 다양합니다.
회의에서 퇴장 당한 영국 하원 의원들의 발언
날짜 의원명 발언
1992.7.2 Dennis Skinner "쥐새끼 (little squirt) 같은 총리"
1994.3.3 Dale Campbell-savours "의원 숙소구매는 훔친 것 (ripped off)"
1995.5.9 Dennis Skinner "사기꾼의 거래 (crooked deal)"
1998.3.3 Ronnie Campbell "위선자들 (hypocrites)"
2004.12.16 Annabelle Ewing "등에다 칼 꽂는 겁쟁이들"
2005.3.17 Adam Price "총리가 하원을 호도하고 있다"
2005.3.24 Laurence Roberston "장관의 대답은 부적절할 뿐만 아니라 부정직하다. 그녀는 하원을 호도하고 있다"
2005.12.8 Dennis Skinner "당시에 유일하게 증가한 것은 소년 (George)와 나머지 사람들 앞에 늘어선 코카인 줄밖에 없다"
2013.7.10 Nigel Dodds "의도적으로 기만적이다"
2016.4.11 Dennis Skinner "교활한 Dave (데이비드 카메론 총리)"
2021.7.22 Dawn Butler "총리가 하원에 거짓말했다"
2022.1.31 Ian Blackford "총리가 하원을 잘못 인도했다"
*자료 : 국회 입법조사처

영국의 역사학자 리처드 토이는 책 <수사학 Rhetoric>에서 '정치적 수사의 차이는 정치 체제의 차이에도 기인한다'고 분석하며, 오스트레일리아와 영국과 같은 다수제 민주주의를 채택한 국가들의 의회에는 '신랄한 정치적 모욕의 전통'이 있다고 말합니다. 다수의 정치적 동원을 목표로 하는 정치 체제에서 거칠고 날 선 말이 사라지기를 기대하는 건, 어쩌면 불가능한 이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똑같이 거친 언어가 오가더라도, 민주주의 종주국의 의회와 우리 국회 사이에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위에 열거한 폭언 사례들은 모두 명시적인 제재를 받았다는 점입니다. 국회 입법조사처는 보고서에서 "다양한 사회세력이 대표되고, 서로 다른 이념과 정책이 경쟁하는 국회에서 상대당이나 의원에 대한 비판은 불가피하다"면서도 "국회에서 직무상 행한 발언에 대해 주어지는 면책특권이 국회의원의 거친 발언을 보호하는 안전판 역할을 한다는 비판도 제기된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면서 "2014년에 국회의장 직속 헌법개정자문위원회는 독일 연방의회의 경우처럼 의원의 '명예훼손이나 모욕적 발언'에 대해서는 면책특권의 적용을 제외하는 방안을 제안한 바 있다"고 소개했습니다. 칼과 총으로 벌어질 폭력을 '말싸움'으로 제도화한 국회에서 거친 말이 오가는 게 우리만의 일은 아니지만, 오랫동안 민주주의를 운영해 온 국가들은 이에 대해 다양한 방식으로 책임을 묻고 있다는 것입니다.

'말과 태도'와 함께 중요한 것이 또 있습니다. 거칠고 날 선 말의 '효용과 목적'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영국 노동당의 데니스 스키너 의원은 거친 언행으로 영국 내에서도 상당한 비판을 받지만, 한편으로는 스스로가 광부이기도 했던 경험을 살려 노동자들의 권익을 지키고 진보 정치의 지평을 확장하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합니다. 우리 정치인들이 꺼내 들고 있는 막말들은 과연 무엇을 지키기 위한 수단인 것인지, 정치인 개인의 단기적인 정치 이익 추구만을 위한 도구는 아니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정치 실종'이 상투어가 된 시대, 여야 정치인들의 '신사협정'은 물론 의미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사방으로 흩어져버린 '말의 화살촉'들이 향할 과녁입니다. 국회는 당장 이번 달부터 정부가 제출한 657조 규모의 예산안을 심사합니다. 총선을 앞두고 눈먼 홍보용 예산 챙기기에서도 '악수'하기보다는, 함께 내건 '민생'이라는 모호한 과녁을 더 뚜렷하고 명확하게 설정하는 데 먼저 힘써야 할 것입니다

** 참고문헌
국회의원의 말; 언어의 품격, 전진영, 국회입법조사처 <이슈와 논점> 제2124호
<수사학 Rhetoric>, 리처드 토이 저, 노승영 역, 교유서가

원종진 기자 bell@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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