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음악과 위로가 필요하다면···‘버텨내고 존재하기’[리뷰]
햇살이 너무 환해 이른 아침인지 한낮인지 짐작하기 어려운 시간. 광주 광주극장의 2층 복도에 가수 김일두의 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아무런 말 한 나는 기억도 알지도 못하는데 나는 왜 지울 수 없을까.” 무심한 목소리는 “너의 발견은 불이었어. 저 해보다 뜨거운 불”이라는 뜨거운 내용의 가사로 이어진다. 공연장이라기엔 비좁고, 뮤직비디오 배경이라기엔 평범한 공간에 우뚝 서서 노래를 부르는 가수의 목소리를 듣다보면 어느새 영화 <버텨내고 존재하기>가 시작되었음을 깨닫게 된다.
1일 개봉한 <버텨내고 존재하기>는 광주극장에서 촬영된 음악 다큐멘터리 영화다. 김사월, 아마도이자람밴드, 불나방스타쏘세지클럽, 김일두, 곽푸른하늘, 고상지&이자원, 정우, 최고은 등 8개 그룹의 인디 뮤지션들이 광주극장의 복도, 매표소, 계단, 상영관, 영사실 등에서 노래를 한다.
<버텨내고 존재하기>는 세계 최대 음악 페스티벌인 글래스턴베리에 한국인 최초로 초청됐던 포크 가수 최고은이 코로나19가 한창일 때 기획한 프로젝트다. 혼자든 함께든 어떻게든 버티는 것, 그래서 계속 존재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깨달았던 시기. 최고은은 어릴 때 즐겨 찾았던 광주극장에 동료 뮤지션들을 초대해 콘서트를 벌인다. “음악을 계속할 수 있을지에 대해 스스로에게 질문이 많았던 시기였고, 코로나 때문에 거짓말처럼 공연이 없었다. 활동을 하면서 ‘생존신고’를 해야 하는 뮤지션 입장에서는 생존신고를 할 방법이 갑자기 막혀버린 거다. 이런 상황에서 음악을 계속할 힘이 나한테 어디 있지, 라는 질문이 나왔다. 그렇게 ‘버텨내고 존재하기’라는 주제가 나왔다.”(최고은)
뮤지션들은 노래를 하기 전이나 후에 이 세상에서 자기 나름대로 ‘버텨내고 존재하는 법’에 대해 짧은 인터뷰를 한다. “저는요, 전에는 생각이 많았거든요. 그런데 그러니까 (행동을) 하지도 않게 되고 그렇더라고요. 생각을 좀 적게 해요. 나쁜 짓 안 하고. 그게 저의 버텨내고 존재하는 법인 것 같아요.”(김일두)
1935년 개관한 광주극장은 멀티플렉스 극장이 기본값이 된 시대에 몇 남지 않은 예술영화전용극장이다. 극장 자체가 ‘버텨내 존재’했다는 상징성이 큰 곳이지만, 카메라는 극장의 전경은 좀처럼 보여주지 않는다. 매표소의 전경보다는 매표소 직원의 어지러운 책상을, 긴 복도 전체보다는 복도 옆 벽면에 붙어 있는 액자를, 계단 한편에 놓여 있는 이름 모를 화분을 카메라에 담는다. 직접 그 공간을 찾아가야만 마주칠 수 있는 디테일한 풍경들이다. 다큐를 보다 보면 언젠가 한번쯤 저곳에 다녀왔던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권철 감독은 “광주극장이 자연스럽게 배경에 녹아 들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작업을 했다”고 말했다.
다큐에는 1993년부터 광주극장의 간판을 그려온 박태규 화백의 인터뷰도 있다. 박 화백은 다큐에서 유일하게 뮤지션이 아닌 인터뷰이다. 그는 대학 때 미술패 활동을 하며 대형 걸개그림을 그리는 연습을 하기 위해 극장 간판 그리는 일을 시작했다가, 지금은 그것이 본업이 되었다. “나에게 소중하고, 재미있고, 행복한 기억이 있다면 그 공간은 존재합니다. 결국 광주극장이 이렇게 오랫동안 버텨낼 수 있는 힘은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인 거죠.”
처음부터 영화로 기획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러닝타임 64분으로 다소 짧다. 한 해의 끝으로 접어들며 ‘올해 어떻게 살았지’ 하는 생각이 든다면 보면서 위로를 받을 수 있는 따뜻한 영화다.
김한솔 기자 hanso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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