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자키 하야오가 일본 군국주의를 미화했다고?('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엔터미디어=정덕현의 그래서 우리는] (글 중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새 작품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소년 마히토가 화재로 인해 어머니를 잃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 화재가 왜 발생했는지는 직접적으로 언급되지 않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무렵이라는 시기는 그것이 그냥 발생한 화재라기보다 폭격의 여파라는 걸 상상하게 한다. 마히토는 그 불길을 향해 달려가지만 어머니는 거대한 불기둥 속으로 사라진다.
전쟁 상황과 화재라는 충격, 그리고 어머니의 부재에 대한 상실감은 그래서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작품이 갖고 있는 판타지의 전제가 된다. 판타지는 결국 현실의 결핍이나 충격에 의해 촉발되어 이세계(異世界)로의 통로를 통과하기 마련이다. 2차 세계대전 중 아이들이 장롱을 통해 나니아라는 곳으로 떨어지며 벌어지는 모험을 다룬 C.S.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가 대표적이다. 전쟁이라는 충격, 장롱이라는 통로, 그리고 이세계의 모험. 이건 판타지의 중요한 구조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려온 판타지의 세계들을 보면 그래서 터널을 통과하는 이야기가 많다. <이웃집 토토로>에서 메이가 처음 토토로를 만나게 되는 것도 무성한 수풀의 터널을 통과하면서였고,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도 치히로가 판타지 세계로 넘어가게 된 것 역시 수상한 터널을 통과하면서였다. 터널은 일종의 판타지의 통과의례로, 미야자키 하야오는 그 장치를 가져와 이세계로의 모험을 풀어간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역시 어머니가 화염 속에서 죽는 충격을 겪은 마히토가 어머니의 고향으로 와 말을 하는 왜가리의 인도를 받아 이세계로 넘어가는데 역시 터널을 통과한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판타지에는 어머니에 대한 서사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그건 아마도 실제 자신이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었던 경험 때문으로 보인다. 사라진 어머니를 찾거나 구하는 주인공의 이야기는 그래서 <이웃집 토토로>에서는 요양원에 있는 엄마를 회복시키고 싶은 아이들의 욕망으로 그려지고,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는 이세계에서 음식을 먹고 돼지가 된 부모들을 구하려는 치히로의 절박함으로 그려진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도 마찬가지인데 여기서 특이한 건 어머니의 죽음 때문에 갖게 된 충격과 상실에 더해져 고향에서 만나게 되는 새엄마에 대해 마히토가 복합적인 감정을 갖는다는 점이다. 이미 뱃속에 아이까지 가진 새엄마에 대해 마히토는 반가워하지도 그렇다고 분노하지도 않는다. 거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데, 그렇다고 무감정한 건 아니다. 특히 금세 새엄마를 들인 아버지에 대해 갖는 마히토의 감정은 이중적이다. 겉으로는 예의를 다하지만 그 속에는 분노 또한 감춰져 있다.
전쟁 상황에 전투기 덮개를 제조해 납품하는 공장으로 큰돈을 벌고 있는 아버지. 어찌 보면 어머니의 죽음은 아버지가 하고 있는 일과 무관하지 않을 테다. 전쟁은 결국 그런 무기들의 개발, 제조와 관련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본의 막부 시대가 저물고 메이지유신을 촉발시킨 쿠로후네 사건만 봐도 알 수 있다. 결국 미국의 페리 제독이 서양의 신식 증기선 전함을 끌고 와 일본의 개항을 요구했던 이 사건의 이면에는 새로운 무기 기술이 바탕이 되지 않았던가.
그래서 어머니가 사망하고 아버지가 새 엄마를 들이고 심지어 동생까지 임신하게 된 데 대해 갖는 마이토의 복잡한 감정은, 그 개인서사를 넘어서 그 이면에 담긴 전쟁 같은 역사적 사건들과 연결된다. 어머니의 고향에 있는 학교의 첫 등교 때부터 자동차를 끌고 가 시골 아이들의 기를 꺾으려는 아무 생각 없는 아버지는 무기가 되기도 하는 기술과 그걸로 갖게 되는 힘을 낙관하는 인물이다. 심지어 희생이 따르더라도.
하지만 마히토는 아버지가 공장에서 만든 전투기 덮개를 보며 감탄하고, 자신 또한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아 칼로 나무를 깎아 활과 화살을 만드는 재능을 보이지만 그러면서도 어딘가 상처와 죄책감 같은 걸 느끼는 인물이다. 영화에서는 대사 없이 원거리 샷으로 동네 아이들과 마히토가 실랑이를 벌이다 싸우는 장면이 등장하지만 그건 당연히 아버지와 관계된 갈등 때문이라고 보인다. 그 동네의 유지지만 무기 제조를 해서 전쟁에 일조한다는 사실이나, 어머니가 죽고 곧바로 새엄마를 들인 사실은 마히토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 아닐까. 그래서 동네 아이들과 싸우고 나서 그 이유를 그는 아버지에게 말하지 않는다. 대신 돌멩이 하나를 들어 제 머리를 찧고 피를 흘린다.
마히토가 가진 아버지와 새엄마에 대한 양가적 감정은, 새로운 기술과 그 혁신을 통해 만들려는 새로운 체제에 대해 미야자키 하야오가 갖는 양가적 감정 그대로다. 그것에 매혹되거나 이끌리면서도 동시에 그것이 파괴한 것들(어머니)에 대한 회한과 안타까움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 양가적 감정은 마히토가 이제 사라진 새엄마를 찾아 하늘에서 떨어졌다는 탑으로 들어가는 통로를 통해 모험하게 되는 이세계의 풍경들을 만들어낸다.
마히토가 만나게 된 이세계는 이질적인 것들이 겹쳐져 있다. 삶과 죽음이 겹쳐 있고, 인공과 자연이 뒤엉켜 있으며, 창조와 파괴가 동시에 일어난다. 그 세계를 인도하고 그 세계를 채우고 있는 존재들이 왜가리, 펠리컨, 잉꼬 같은 새들이라는 점도 그렇다. 새는 하늘과 땅의 경계를 오가는 은유적 동물이다. 마히토가 만나는 새들은 그래서 자유의 상징처럼 하늘을 유영하는 듯 보이지만, 동시에 먹을 것이 없어 저세계의 생명으로 변화할 와라와라까지 잡아먹는 생존에 구속된 존재로도 또 떼로 몰려다니며 본능에 휘둘리는 존재로도 그려진다.
와라와라를 구하기 위해 불길을 솟구치게 해 펠리컨을 공격하는 히미 역시 펠리컨만을 떨어뜨리지는 않는다. 그 과정에서 와라와라들도 불타 죽게 되는 것. 불을 만들어내는 무기로도 활용되는 기술은 그렇게 무차별적이다. 심지어 선의조차 누군가에게는 악의가 될 수밖에 없다. 이세계로 표현되는 마히토의 감정은 그래서 아버지가 낙관하는 기술에 대한 회의와 의심을 드러낸다.
결국 그 세계로 들어간 새엄마와 뱃속의 동생을 구하기 위한 모험에서, 마히토는 그곳에서 거대한 바위 아래 도형으로 된 블록을 쌓아 균형을 맞추려는 오랜 선조인 외할아버지를 만난다. 그 할아버지는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탑에 매혹되어 그 탑을 둘러싸는 건물을 짓고 그 안에 책 속에 파묻혀 살다가 사라진 인물이다. 아마도 막부 시절 막강한 부와 권력을 누렸을 것으로 보이는 이 인물의 등장은 서구 열강의 등장으로 서구의 과학기술과 사상을 통해 메이지 유신을 하려했던 그 혁신의 끝단이 과연 성공할 수 있는가를 묻는다.
이세계로 넘어와 서구의 사상과 기술을 받아들여 완벽한 세계를 꿈꿨지만 그 결과는 금세라도 무너질 것처럼 아슬아슬한 균형 아래 놓여있다. 그걸 상징하듯 도형모양으로 쌓여 아슬아슬하게 세워져 있는 블록의 균형을 맞추는 일을 할아버지는 마히토에게 제안한다. 자신이 실패한 것을 후대가 완성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나타난 펭귄 대왕이 휘두른 단칼에 그 블록이 무너져 내리고 그래서 이세계가 무너지는 광경은 그것이 얼마나 위태롭고 허망한 일인가를 드러낸다.
결국 판타지는 떠났던 자가 그 환상의 세계로부터 다시 현실로 복귀하는 서사 구조를 갖는다. 마히토는 이세계의 대혼돈을 경험하고 그 곳에서 새엄마를 찾아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그런데 떠나기 전 마히토가 가졌던 그 복잡한 심경들은 이세계의 모험 과정을 통해 정답은 아니지만 어떤 해답을 찾아낸다. 새엄마를 구하기 위해 찾아 나선 모험이지만 그 곳에서 만나게 된 소녀였던 엄마가 결국 훗날 화염 속에서 죽을 걸 알면서도 현실로 돌아가는 그 선택을 통해서다. 그건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갈구나 혁신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일들이 아이러니하게도 세상을 파괴하기도 하는 이 혼돈 속에서도 판타지라는 환상에 빠지기보다는 현실을 직시하고 외면하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혹자들은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군수업자 아버지의 모습이나, 펠리컨이 와라와라를 잡아먹으며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다는 대목 등을 통해 이 작품이 일본의 군국주의를 미화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보다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실제 겪었던 어린 시절의 사적 경험들을 모티브로 해서 막부 시대에서 메이지유신으로 넘어오는 일본의 역사적 변화가 만들어낸 현재를 판타지를 통해 담아낸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즉 그건 군국주의 미화보다는 그런 선택이 결국은 실패했고 그러니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묻는 것에 가깝다. 친절한 작품이 아니고 은유와 상징이 많이 들어 있어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 해석도 호불호도 나뉠 수 있는 작품이지만, 사적인 이야기와 역사 그리고 지금껏 해왔던 판타지의 세계까지 하나로 품어낸 야심작이 아닐 수 없다.
정덕현 칼럼니스트 thekian1@entermedia.co.kr
[사진=영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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