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 한국 풍속화가 춤으로…"시대상과 민족성 담았죠"
혼례·독립운동·무당 등 1막7장 구성…"한국 정서에 스피드·에너지 더한 현대무용"
(서울=연합뉴스) 강애란 기자 = 동네잔치가 벌어진 혼례 풍경, 빨래하느라 분주한 여인들, 독립운동을 하다 일본군에 잡혀가는 민중들….
한국을 사랑한 영국 화가 엘리자베스 키스(1887∼1956)가 남긴 한국 풍속화가 현대적인 감각의 춤으로 재탄생한다. 서울시무용단이 2∼5일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선보이는 신작 '엘리자베스 기덕'에서다.
개막을 이틀 앞둔 지난달 31일 세종문화회관에서 공동 안무를 맡은 정혜진 서울시무용단 단장과 현대무용가 김성훈을 만났다.
두 사람은 "100년 전 한국을 바라본 이방인의 그림에 한국에 대한 애정이 가득하다"며 "그림에 담겨있는 시대상과 우리의 민족성을 춤에 담았다"고 작품을 소개했다.
'엘리자베스 기덕'은 키스가 남긴 80여점의 한국 풍속화 중 '시골 결혼잔치', '신부행차', '원산 학자와 그 제자들' 등 24점을 1막 7장으로 재구성했다. 그림뿐 아니라 키스가 친언니와 주고받은 편지에 담긴 한국에 대한 인상과 감정도 작품에 녹였다.
키스는 독립운동이 한창이던 1919년부터 20년간 한국을 여러 차례 찾아 당시의 풍경을 화폭에 담아냈다. 한국의 크리스마스실(seal)도 세 차례 디자인했으며, 낙관(落款)을 한국식 이름인 '기덕'으로 바꿀 정도로 한국에 깊은 애정을 보였다.
공연은 절벽에서 파도치는 풍경을 바라보는 키스의 뒷모습으로 시작해 훈장님을 따라다니는 아이들, 노동으로 바쁜 여인들, 홀로 방 안에 갇혀 신랑을 기다리는 색시, 독립운동을 하다 끌려가는 사형수들의 행진, 영혼을 달래는 무당 등의 장면으로 옮겨간다. 이윽고 이들의 삶에 동화된 키스의 모습으로 막을 내린다.
정 단장은 "2008년 전시회에서 키스의 그림을 보고 무용 작품으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 했다"며 "당시에는 그림이 깔끔하고 예뻐서 아기자기한 작품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떠올렸다.
그는 "하지만 시간이 지나 키스가 언니에게 쓴 편지를 보면서 작품 방향이 달라졌다. 당시 우리나라가 갖고 있던 정신을 작품에 넣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편지를 보면 한국인은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고 일본군에 끌려갈 때 당당하고 늠름해 보였고, 오히려 일본인이 초라하고 왜소해 보였다는 내용이 있다"며 "이런 모습을 안무에 반영했다. 끌려가는 장면에서 하얀 옷을 입은 무용수들은 몸을 구부리지 않고 온전히 서 있으면서 꿋꿋한 느낌을 낸다"고 귀띔했다.
작품에서는 100년 전 시대상도 엿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남자들은 장기를 두며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여인들이 빨래, 요리 등의 노동으로 바쁜 하루를 보내는 모습이 대조적으로 등장한다.
김성훈 안무가는 "작품 속 시대상과 오늘날을 비교해 보는 것도 재밌을 것"이라며 "결혼식 풍경만 봐도 요즘은 '스몰 웨딩'이라는 말도 나오는데, 100년 전에는 동네잔치처럼 떠들썩하게 치렀던 모습을 볼 수 있다"고 소개했다.
그림을 춤으로 재탄생시킨 작품이지만, 그림 속 장면을 보이는 대로 안무로 표현하지는 않는다. 상황을 몸짓으로 설명하는 마임도 넣지 않았다. 대신 무대 디자인을 마치 그림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도록 연출했다. 두루마리 형상을 한 무대에 영상으로 그려낸 한국의 풍경이 펼쳐지고 무용수들이 그림의 일부가 된다.
김 안무가는 "키스의 그림을 안무로 적나라하게 표현하기보다는 그림 이면에 있는 것들을 이미지화하려고 했다"며 "그림에서 상상할 수 있는 부분들이 판타지처럼 펼쳐질 것"이라고 자신했다.
작품은 한국무용과 현대무용의 만남으로도 눈길을 끈다.
정 단장은 "한국무용과 현대무용은 춤사위가 다르다"며 "한국무용은 선의 아름다움을 부각하지만, 현대무용은 근육을 움직이는 에너지를 폭발시킨다. 이 두 가지를 섞은 것이 이 작품의 안무 특징"이라고 말했다.
김 안무가는 "한국적인 정서에서 시작해 컨템퍼러리로 나아간다"며 "현대무용 측면에서는 빠른 템포의 움직임이나 역동적인 에너지를 가미했다"고 덧붙였다.
"키스가 우리나라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그림을 그렸던 것처럼, 관객들이 '엘리자베스 기덕'을 보며 우리나라 민족성을 느끼고 자긍심을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aera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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