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석기의 과학카페] '병주고 약주는' Y염색체의 두 얼굴
지난주에 이어 여전히 미디어를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전 국가대표 펜싱 선수가 낚인 결혼 사기극의 전개는 드라마 작가도 상상하기 힘든 수준이라 어안이 벙벙하다. 상황에 따라 남녀를 오가고 때로는 자신이 성전환자라고 고백했는데 이게 다 먹혔으니 말이다. 특히 ‘고환을 이식받아’ 상대를 임신시킬 수 있다고도 했다니 SF의 한 장면 같다.
이번 해프닝을 지켜보며 남녀의 정체성에 대해 새삼 생각해본다. 몸이 먼저일까 마음이 먼저일까. 몸에서도 세포가 먼저일까 전체 생김새가 먼저일까. 오늘날 법은 마음을 우선시하는 쪽으로 바뀌고 있다.
예를 들어 생김새는 여성인데 자신을 남성으로 인식해 성전환수술로 생김새를 남성으로 바꾸면 남성으로 인정해주는 식이다. 물론 이 사람 세포의 성염색체는 여전히 ‘XX’이지만 말이다.
세포생물학에 충실한 필자는 소위 정치적 올바름의 하나인 이런 경향이 거슬렸다. 그런데 최근 학술지 ‘사이언스’에 실린 한 기고문을 읽으며 ‘과학적 올바름’이라고 믿고 있는 것의 토대가 생각보다 견고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예를 들어 지금 내 몸에 Y염색체가 없는 세포(XO, O는 성염색체가 없다는 뜻이다)가 상당수 존재하고 나이가 들수록 비율이 는다면 내 몸은 남녀의 키메라라고 볼 수 있다(수정란부터 X염색체가 하나뿐(XO)인 경우 여자가 되며 터너증후군이라고 부르는 일련의 증상이 나타난다).
기고문은 성염색체가 단순히 성별을 결정하는 역할 뿐 아니라 남녀 사이에 특정 질병의 발병률이나 사망률에 차이가 나는 원인이라는 최근 연구 결과를 소개했다. 특히 남성에게만 있는 Y염색체가 주요 변수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Y염색체 소실’이라는 흥미로운 현상도 소개했다.
성체줄기세포가 분열할 때 종종 실수가 일어나 Y염색체가 없는 줄기세포가 생긴다. 여기서 분열돼 생긴 세포는 모두 Y염색체가 없다. 나이가 들수록 이런 세포의 비율이 올라가 70세가 넘는 남성 백혈구의 무려 40%가 Y염색체 소실 상태라고 한다. 이런 변화가 특정 질병에 걸릴 위험성을 높이게 된다.
● 병 주고 약 주고
지난 6월 학술지 ‘네이처’에는 Y염색체가 암 진행에 미치는 영향을 파헤친 논문 두 편이 실렸다. 다른 질병처럼 암 역시 종류에 따라 성별에 따라 발병률과 사망률에서 차이가 나는데 대부분 남성이 취약하다. 실제 일생 동안 암에 걸릴 확률도 남성이 40%, 여성이 30%로 남성이 높고 생식계 관련 암(유방암, 자궁암, 고환암 등)을 빼면 차이는 더 커진다.
지금까지는 이런 현상을 생활 습관의 차이로 설명했다. 남성이 흡연과 음주 등 몸에 해로운 습관을 지닌 비율이 높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통계 기법으로 이런 영향을 빼도 여전히 남녀의 차이가 뚜렷하다. 그런데 그 주요 원인이 바로 Y염색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예를 들어 대장암의 경우 소위 발암유전자로 알려진 KRAS 유전자의 돌연변이로 촉발되는 경우가 많다. 세포 성장과 분열을 촉진하는 KRAS는 상황에 따라 스위치가 켜지고 꺼져야 하는데 변이가 일어나면 늘 켜져 암세포가 된다. 그런데 KRAS의 영향을 받는 유전자의 하나가 Y염색체에 있는 KDM5D다.
KRAS 변이로 KDM5D의 활성이 커지면 암세포 사이의 연결이 느슨해지고 면역세포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게 된다. 그 결과 종양에서 암세포가 쉽게 떨어져 나가 전이가 일어날 위험성이 커지고 면역세포가 암세포를 제대로 공략하지 못한다. 앞으로 KDM5D를 공략하는 약물을 개발하면 남성 대장암 환자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반면 방광암의 경우 Y염색체 소실이 오히려 증상을 악화시킨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남성 방광암 환자의 암조직에서 Y염색체가 없는 암세포를 생쥐에 넣어주면 Y염색체가 있는 암세포를 넣어준 생쥐에 비해 암이 훨씬 공격적으로 진행되는 것으로 밝혀졌다. 방광암에서는 Y염색체가 암 진행을 억제하는 역할을 하는 셈이다.
● 심혈관계에도 악영향
Y염색체 소실은 암뿐 아니라 다른 질병에도 영향을 미친다. 지난해 ‘사이언스’에는 Y염색체가 소실된 백혈구가 심혈관계 질환의 위험 요인인 심장섬유화를 촉진하는 메커니즘을 밝힌 논문이 실렸다.
다른 장기의 세포에서 Y염색체 소실이 일어나면 그 영향이 제한적이지만 혈관을 따라 순환하는 백혈구는 전신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게다가 Y염색체 소실이 가장 흔한 세포가 바로 백혈구다. 골수에서 조혈모세포(줄기세포)가 끊임없이 분열하며 세포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실제 영국 바이오뱅크의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Y염색체 소실 백혈구의 비율이 40%가 넘는 남성 그룹은 심혈관계 질환으로 사망할 위험성이 40% 미만인 남성 그룹에 비해 31% 더 높았다.
‘사이언스’ 논문은 Y염색체 소실 백혈구가 심장섬유화를 촉진하는 게 그 원인임을 밝혔다. 골수에서 만들어진 백혈구인 단핵구는 심장 근육에 이르러 대식세포로 분화해 자리를 잡는다. 그런데 Y염색체 소실 대식세포는 반복되는 심근 수축에 자극을 받아 섬유아세포를 활성화하는 성장인자를 분비하고 그 결과 세포외기질의 섬유화가 일어나 근육이 점차 굳어진다.
나이가 듦에 따라 Y염색체가 소실된 세포의 비율이 늘어나지만 그 속도는 생활 습관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특히 흡연은 Y염색체 소실 백혈구의 비율은 3배나 높이는 것으로 밝혀졌다. 건강은 물론 남성의 세포 정체성을 좀 더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담배는 멀리해야겠다.
※ 필자소개
강석기 과학칼럼니스트. LG생활건강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고 2000년부터 2012년까지 동아사이언스에서 기자로 일했다. 2012년 9월부터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강석기의 과학카페》(1~10권), 《생명과학의 기원을 찾아서》, 《식물은 어떻게 작물이 되었나》가 있다.
[강석기 과학 칼럼니스트 kangsukki@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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