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원의 경제 프리즘 <16>] 숫자의 정의와 불의…통계의 정치경제학

김경원 세종대 경영경제대학장 2023. 11. 1.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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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셔터스톡

#1│성경 첫 부분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하느님께서는 엿새 날까지 하시던 일을 다 마치시고, 이렛날에는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셨다.” (창세기 2장 2-3절; 공동 번역). 인간 역사의 시작을 묘사한 대목에 숫자가 들어가 있는 것이다. 성경 이외 인류 역사의 시작을 묘사하는 거의 모든 신화에도 숫자가 등장한다. 예를 들어 우리 단군신화에도 환웅은 곰이 삼칠일(21일) 동안 쑥과 마늘을 먹고 사람이 되자 그와 혼인하여 단군을 낳았다고 되어 있다. 그리스신화에도 하늘의 신 우라노스와 대지의 여신 가이아 사이에서 12명의 거인족 ‘티탄’들이 태어났고, 이들을 제거하고 세상의 주도권을 잡은 것이 올림피아의 12신이다. ‘12’라는 숫자가 상징성을 가지고 반복되고 있다. 이렇듯 인간의 역사는 언어와 더불어 숫자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2│은행 입구에 가면 ‘ATM(Automatic Teller Machine)’이라 불리는 자동입출금기가 보인다. 필자 친구들 중에 영어 좀 한다는 몇몇이 그 이름에서 ‘텔러’라는 단어를 봤냐면서, 글자로만 사용법을 안내해 주는 이 기계에 음성 안내가 없는 것이 이상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는 오해다. ‘텔(tell)’이라는 영어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말하다, 구별하다’ 등에 이어 맨 마지막쯤에 ‘셈을 하다, 돈 등을 세다’라는 뜻이 나오는데 은행의 텔러는 바로 이 뜻으로 쓰이기 때문이다. 고대 영어나 영시에서도 이 마지막 뜻으로 쓰이는 예가 많다. 그런데 ‘텔(tell)’의 어원은 고대 영어인 ‘텔란(tellan)’으로 ‘계산하다, 셈하다, 숫자를 세다’의 뜻을 가졌다. 이것이 12세기쯤 ‘말해서 알려주다’라는 뜻으로 확장됐다고 한다. 이는 ‘숫자’란 그 자체가 ‘말하고 알려주는 역할을 하는 것’임을 암시해 준다.

#3│어떤 현상이나 객체에 관련된 숫자를 모아 그 의미를 찾는 것은 ‘통계’다. 통계의 사전적 의미는 ‘한데 몰아서 어림잡아 계산함’ 또는 ‘어떤 현상을 종합적으로 알아보기 쉽게 일정한 체계에 따라 숫자로 나타냄’이다. 그런데 이런 작업이 가장 큰 스케일로 이뤄지는 것은 국가 통계다. 이는 국가 정책 결정의 기본적인 인풋으로 활용되기 때문에 그 중요성은 매우 크다고 하겠다. 잘못된 통계를 기초로 정책을 짜면 나라 전체가 잘못될 수 있기 때문이다. 통계의 영어 단어인 ‘스태티스틱스(statistics)’의 어원인 라틴어 단어 ‘스타티스티쿰(statisticum)’의 뜻이 ‘국가의, 나랏일들의’의 뜻인데, 이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4│심리학에서는 ‘병적 거짓말(pathological lie)’ 또는 ‘공상 허언증(mythomania)’이라는 심리 현상이 있다. 이는 자기가 거짓말을 해놓고 반복한 결과 이를 진짜로 믿는 지경에 다다른 경우다. 약 15년 전 한 큐레이터가 예일대 박사 취득 등 학력을 허위로 만들어 교수 임용에 이어 유명 인사가 된 사실이 발각된 사건이 있었다. 하지만 본인은 대리 출석 등으로 학위를 받은 것이 사실이라 우겨서 사람들의 질타를 받았으나 시간이 더 지나면서 이 사람은 자기의 거짓말을 진짜로 믿는 심리상태에 빠져 있다고 의심하는 여러 전문가의 주장이 나왔다. 이와 비슷하게 요즘 정치권에서도 많이 언급되는 ‘확증편향’도 있다. 자기가 믿고 싶은 바를 정해놓고 이에 부합하는 정보는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은 정보는 모조리 걸러내는 것이다.

김경원 세종대 경영경제대학장현 세종대 부총장, 전 대성합동지주 사장, 전 CJ그룹 전략총괄기획 부사장, 전 삼성경제연구소 전무, 전 삼성증권 리서치센터장

전술한 대로 숫자는 인류와 함께 시작돼 숫자 없이는 경제, 징세, 국방 등 하루도 인류의 생이 지탱될 수 없을 정도다. 숫자 자체가 의미를 가지고 알려주는 기능을 하고, 이런 숫자를 모아 민간뿐 아니라 국가에서도 통치를 위해 통계를 내고 활용한다. 원래 어원과 일치되는 모습이다.

그런데 통계는 문제가 있다. “세 종류의 거짓말이 있다. 거짓말, 빌어먹을 거짓말, 그리고 통계다.” 20세기 초 이 문구는 미국 작가 마크 트웨인이 인용한 후 유명세를 치렀다. 그만큼 통계가 진실을 왜곡하는 데 쓰이거나 그 자체를 조작하기 쉽다는 것이다. 통계를 다뤄 본 사람들은 잘 아는 사실로, 그 수법은 다음과 같다.

첫째, 그 통계 수치를 의도적으로 과장되거나 평가절하해 해석하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통행이 한산한 시골 도로 사고 건수가 연간 1건에서 2건으로 늘어난 경우 사고가 100% 늘었다고 발표하는 식이다. 둘째, 마스킹(masking)이다. 실력 없는 음식점이 원재료의 부실을 숨기기 위해 맵고 짠 맛을 강조하는 경우처럼, 부정적인 통계 수치를 다른 긍정적인 통계 수치 여럿과 함께 발표하는 것이다. 셋째는 숫자 자체를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바꾸어 입력하거나 원하는 수치가 나올 때까지 조사 표본과 입력 항목들의 가중치를 계속 바꾸는 것이다. 현장에서는 이를 쿠킹(cooking·요리)이나 마사지로 부른다. 넷째는 최종적으로 구해진 수치를 아예 다르게 보고 또는 발표하는 것이다. 이것은 ‘가짜 뉴스(fake news)’나 ‘허위 정보(disinformation)’를 만드는 것으로서 이 단계가 되면 통계는 정말로 ‘빌어먹을 거짓말’이 된다.

지난 9월 감사원은 전임 정부가 정책 실패를 감추려 부동산 가격, 소득·분배·고용에 관한 정부 통계를 광범위하게 조작해 왔다고 밝힌 데 이어, 통계 조작을 주도한 혐의로 전임 정부 청와대의 주요 인사 등 22명을 검찰에 수사 의뢰했다. 부동산은 통계 조작이 가장 심했던 분야로서, 한국부동산원이 매주 발표하는 ‘주간 아파트 가격 동향’ 통계를 5년간 최소 94차례나 조작했다고 한다. 최종 수치가 높게 나오면 청와대가 이 기관에 압박을 가해 통계 조작을 유도하고 국토부도 “조직과 예산을 날려버리겠다”고 가세했으며, 이에 이 기관은 표본 가격을 낮춰 입력하는 등 통계를 ‘창작’했던 사례로 언급됐다. 소득·분배·고용 통계도 그 대상이었다고 한다. 예를 들어 2017년 6월 가계소득이 전년 동기 대비 0.6% 감소한 것으로 나오자, ‘가중치’를 바꾸어 1% 오른 것으로 ‘만들었다’. 최저임금을 크게 올렸는데도 소득 분배가 더 나빠진 것으로 나오자, 청와대는 노동연구원을 시켜 하위 10%를 제외한 근로소득은 모두 늘었고, 소득 불평등도 개선됐다는 결과를 만든 사례도 나왔다. 이후 소득 격차 배율도 최악 수치가 나오자 또 가중치 조정으로 줄여 발표했다. 그래도 불리한 통계가 계속 나오자 통계청장을 교체했다. 새 통계청장은 “좋은 통계로 보답하겠다”며 표본과 조사 기법 등을 모두 바꿔 과거 수치와 비교 불가로 만들었다.

“집값이 안정되고 있다”거나 “최저임금 인상의 긍정적 효과가 90%”라는 당시 대통령의 발언은 이런 엉터리 통계에 근거한 것이었다. 이런 것들이 사실로 밝혀진다면 전임 정부는 ‘쿠킹’ ‘마사지’ ‘허위 정보 양산’을 모두 저지른 것이 된다. 물론 이를 기초로 입안된 정책도 잘될 리 없다. 27차례 발표된 부동산 안정책이 그 예다. 그런데 감사원 발표 이후 지난 정부의 인사들은 일제히 반발했다. ‘통계 조작’이 아니라 ‘감사 조작’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입장이 묘하다. 정말로 지난 정부에서 집값은 안정되었으며 ‘소주성(소득주도성장)’ 정책의 효과가 컸다고 믿는 모양새가 보이기 때문이다. 감사원 감사 결과가 추후에 사실로 확인된다면 이들은 임기 중에도 이미 약하게는 ‘확증편향’이며 심하게는 집단적으로 ‘공상 허언증’에 빠져 있지 않았냐는 의구심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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