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혜진의 엔딩노트 <73>]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하지 않는 꿈을 꾸다

박혜진 2023. 11. 1.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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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셔터스톡

작은 열매가 성장해 어엿한 크기의 열매가 되기 위해서는 잎들로 둘러싸여 있어야 한다. 잎으로부터 영양분을 얻기 때문이다. 사과의 경우 크기에 따라 적정 잎의 개수에도 차이가 있다고 한다. 작은 과실은 30~40장의 잎이 필요하고 부사처럼 큰 과실은 50~70장의 잎이 적당하다. 그러나 충분히 자란 열매는 더 이상 잎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럴 땐 잎을 ‘청소’해 주어야 한다. 영양을 공급해 주고 외부 환경으로부터 보호해 주었던 잎들에서 벗어난 열매가 홀로 뜨거운 태양을 상대할 수 있도록. 크고 붉은 사과 한 알이 얻어지기까지 필요한 잎과 빛의 시간이다.

박혜진 문학평론가 조선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 한국문학평론가협회 젊은평론가상, 현대문학상

가을 한복판에 이르면 나는 종종 일손이 부족한 부모님을 돕기 위해 사과밭이 있는 곳으로 차를 몬다. 문학적 사고방식에 익숙한 사람들은 걸핏하면 자신이 경험하는 일들을 인생에 비유하는 습성이 있다. 나도 예외는 아니어서, 끝이 보이지 않는 사과 잎 따기를 하고 있자면 습관처럼 그때 그 순간의 과정들을 인생에 비유하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성장하려면 자신을 보호해 주던 존재들에게서 벗어나 혼자가 되어야 한다는 맹숭맹숭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내가 사과 잎을 따며 생각한 것들은 그보다 조금 더 까다롭지만 조금 더 진실되다.

우리의 삶이 한 알의 사과라고 할 때, 현실은 직사광선에 노출된 사과와 같고 비현실은 잎으로 가려진 사과와 같다. 무슨 말이냐 하면, 어떤 장애물도 없이 적나라한 직사광선을 받아 내는 것이 의식이자 현실이라면, 잎으로 가려져 있고 잎을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받는 것은 무의식이자 비현실이라는 얘기다. 요컨대 현실이 빛이라면 비현실은 그림자다. 이때 빛과 그림자 사이에는 어떤 위계도 없다. 둘 중 하나가 결여됐을 때 사과가 사과로서의 인생을 살아낼 수 없듯 우리는 빛과 그림자를 동등하게 취급해야 한다. 그림자를 대할 때 빛과 같이 단언해야 하고, 빛을 대할 때 그림자처럼 의심해야 한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신작을 출간했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이라는 제목의 장편소설이다. 나는 노년의 작가가 쓴 신작들에는 장르를 불문하고 경전으로서의 속성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스스로 다음 책을 기약하기 힘들다고 생각하는 시점에서 쓰는 글이란, 혹은 책이란, 어느 정도 유언이나 유서의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는 이 소설을 하루키가 우리에게 일러주는 궁극의 인생 사용법으로 읽었다. 빛과 그림자를 동등하게 취급해야 하는 이유가 궁금하다면 이 책을 읽으면 된다. 소설은 두 개의 세계 위에서 움직인다. 하나는 꿈의 세계다. 서로를 좋아하는 소년과 소녀가 함께 상상 속의 도시를 건설한다. 그 도시는 물리적 형상이 없지만 두 사람이 함께 그려가는 시간 속에서 도시는 그들의 마음속에 실재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세계가 그러하듯이. 다른 하나는 다 자란 소년이 속한 현실 세계다. 소년은 자라서 소년 시절의 상상 속에나 있었을 법한 도서관에 취직한다. 그리고 묘한 만남이 시작되는데, 일례로 그는 도서관에서 유령을 만난다. 몇몇의 눈에만 보이는 유령은 소년에게 분명 물리적 형상을 지닌 채 나타난다. 그러나 그 유령은 더 이상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 말 그대로 유령, 죽은 사람이니까. 그러니 소설이 움직이는 두 세계란 없으면서 있는 꿈의 영역과 있으면서 없는 현실의 영역이다.

무엇이 있는 것이고 무엇이 없는 것일까. 무엇이 그림자고 무엇이 빛일까. 도시는 인간 의식이 만든 문명이다. 인간 의식의 증거로서 도시는 안쪽과 바깥쪽을 구분하는 벽을 가진다. 벽은 의식의 시작이자 끝이며, 한마디로 전부다. 그러나 벽에 속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그 벽이 나누고 있는 것들은 언제나 자리를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이다. 빛과 그림자는 반대의 특성이 있지만, 무엇이 빛이고 무엇이 그림자인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알 수 없으므로 둘은 동시에 받아들여져야 한다. ‘무엇보다 깊고, 어디까지나 부드러운 어둠’이란 마지막 문장에는 하루키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진실이 스며들어 있다. 만질 수 있고 헤아려 볼 수 있는 어둠은 빛이다. 의식할 수 있는 비현실은 현실이다. 무엇이 어둠이고 빛인지, 현실이고 비현실인지 우리는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알 필요도 없는 것이다. 벽을 세우지만, 그 벽은 넘나들기 위해 존재한다. 꿈을 꾸라고 하지만 실상 어떻게 꿈꿔야 하는지 알지 못한 채 평생 꿈꾸는 사람만을 꿈꾸다 삶을 그치고 마는 사람도 많다. 꿈을 꾼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하지 않는 것이다. 눈앞에 있는 것과 머릿속에 있는 것을 하나의 차원으로 바라볼 수 있는 상태다. 과거와 현재를, 현재와 미래를 선택의 차원이 아니라 공존의 차원으로 치환하는 능력 속에서 우리는 꿈을 읽을 수 있고 꿈을 이룰 수 있는 존재가 된다. 인간은 꿈꾸는 동물이라는 말의 진실이다. 나는 이것이, 노년의 하루키가 경전과도 같은 책에서 인간과 인간의 삶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진실의 핵심이 아닐까, 짐작한다.

하루키가 말하는 꿈의 공식이자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이란 제목에 담긴 의미이며, 유한한 인생을 살아가는 지혜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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