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별인생] “문화 차이 있지만 정 많은 사람들 좋아…제주 정착 위해 신부 됐죠”

황지원 2023. 11. 1. 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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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별인생] (16) 제주 한림 성이시돌목장 지키는 마이클 리어던 신부
봉사활동하며 2년반 머물렀다가
사제 서품 받은 후 다시 한국으로
500㏊ 목장 지키며 협회도 꾸려
젖소·경주마 키워 얻은 수익으로
호스피스 병원·어린이집 등 운영
“돈이 아닌 모두가 잘 사는 것 목표”

제주시 한림읍 한라산 중산간지대엔 유기농 방식으로 젖소가 자라고 말이 뛰어노는 성이시돌목장이 있다. 1961년 아일랜드에서 온 패트릭 제임스 맥글린치 신부(한국명 임피제)가 세운 이곳은 농부의 수호성인인 ‘성 이시도르’에서 이름을 따왔다. 맥글린치 신부는 제주에서 양돈사업을 처음 시작하며 농가에 개량종 돼지를 보급하고 양돈업을 가르쳤다. 아일랜드에서 건축 기술을 익혀 부족한 건축자재를 최대한 활용한 ‘테시폰식 주택’을 짓기도 했다.

아일랜드에서 온 마이클 리어던 신부는 제주시 한림읍에 있는 성이시돌목장을 운영하며 사회복지 활동에도 힘쓰고 있다. 유기농방식으로 젖소를 사육하는 리어던 신부.

1978년 맥글린치 신부의 뒤를 이어 또 한명의 아일랜드인이 성이시돌목장에 도착했다. 목장을 비롯해 요양원, 호스피스 병원 등을 운영하는 이시돌농촌산업개발협회 이사장을 맡고 있는 마이클 리어던 신부(한국명 이어돈)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땐 평생을 이곳에서 보낼 거라곤 상상도 못했죠.”

1954년 아일랜드에서 태어난 마이클 리어던 신부는 대학에서 수의학을 전공했다. 1978년 친하게 지내던 교수님으로부터 성이시돌목장에서 봉사활동을 해보지 않겠느냐는 권유를 받고 그는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주위 사람들은 모두 그가 한국에 가는 것을 말렸다.

“어떤 친구는 저에게 바보라고 하더군요.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나라인 한국에 간다니 부모님도 걱정이 많으셨죠.”

그는 제주에 와 성이시돌목장과 제주농가들의 가축을 돌봤다. 그를 가장 힘들게 한 것은 문화 차이였다. 하루는 소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급하게 농가에 가 치료했다. 고맙다고 할 줄 알았던 주인은 소를 보기 전에 자신에게 먼저 인사를 안했다며 되레 화를 냈다. 그렇지만 다른 정 많은 제주 사람들 덕분에 타향살이를 버텼다. 그는 애초에 약속한 2년을 보내고 반년을 더 제주에 머문 후 아일랜드로 돌아갔다.

그리운 제주에 정착할 방법을 생각하다 그는 신부가 되기로 결심했다. 평생을 제주도민을 위해 헌신한 맥글린치 신부의 모습에 감명을 받았을 뿐 아니라 외국인으로 타지에 살기 가장 좋은 방법은 신부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누구나 천주교를 믿는 아일랜드인과 달리 성당에 다니지 않는 제주 사람들을 보며 ‘하느님을 믿지 않아도 열심히 살면 천국에 갈 수 있지 않을까?’라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결국 그는 1986년 사제 서품을 받고 그해 바로 한국으로 돌아왔다.

입국 후 서울에서 여러 활동을 하던 리어던 신부는 2000년대초 제주에 와 맥글린치 신부와 함께 이시돌농촌산업개발협회를 꾸려나갔다. 협회는 제주도민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고민하며 양돈업뿐 아니라 다양한 사업을 운영했다. 1962년 세워진 제주 최초 신용협동조합인 ‘한림신용협동조합’, 1500명 이상을 고용하며 여성 일자리를 만들어낸 방직공장 ‘한림수직’ 등이 그 예다. 리어던 신부는 2010년부터 협회 이사장이 됐다. 가축만 돌보면 됐던 생활과 이사장이 된 후의 삶은 180도 달랐다.

“언어나 법률을 잘 모르는 외국인으로서 사업을 진행할 때 정부 허가를 받는 과정이 정말 힘들었어요. 그땐 아일랜드로 도망가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성이시돌목장에 있는 테시폰식 주택은 제주 중산간지역 목장 개척사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건축물로 2021년 국가등록문화재가 됐다.

그가 신부로 오고 난 후 성이시돌목장은 위기를 헤쳐가며 많은 변화를 맞았다. 2012년엔 돼지 대신 젖소와 경주마를 키우는 것으로 수익구조를 바꿨다. 돼지를 계속 키워 돈을 벌 수도 있었지만 다른 양돈농가와 경쟁하지 않기 위함이었다. 목장 수익은 호스피스 병원, 요양원, 어린이집, 청소년 수련원 등을 운영하는 데 쓰인다.

“목장 전체 부지가 500㏊(150만평)나 돼요. 어떤 사람은 ‘땅을 팔아라, 그 땅에 돈 되는 사업을 더 하자’고 말하기도 합니다.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잘 살게 하는 것, 성이시돌목장의 절대적인 목표예요.”

60년 전엔 농민들에게 힘이 됐던 성이시돌목장이 지금은 말을 보려고 모인 관광객을 맞고 있다. 입장료는 없다. 리어던 신부는 이들을 보며 또 다른 꿈을 꾼다.

“제가 처음 왔던 1970년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한국의 경제 상황이 좋아졌어요. 하지만 ‘사람들이 더 행복해졌냐?’라는 질문엔 ‘그렇다’고 답하기 어렵죠. 목장에 온 사람들이 마음의 평화를 얻도록 도울 방법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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