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거일의 이승만 오디세이] 美 반대에도 반공포로 석방… 납북될뻔한 남한 청년 2만명 구했다
1951년 4월에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 원수는 트루먼 대통령에 의해 갑작스럽게 해임되었다. 그가 한국전쟁을 제한전(limited war)으로 치르려는 트루먼 정권의 정책에 공개적으로 반대했기 때문이다.
원자탄을 쓰지 않는 제한전을 하기로 미리 방침을 정한 터라, 미군은 풍부한 인적 자원을 지닌 중공군에 이길 수 없었다. 승산이 없기는 중공군도 마찬가지였다. 내리 다섯 차례의 공세를 폈지만, 중공군은 얻은 것이 없었다. 인해전술로 전선을 돌파해도, 보급 능력 부족으로 공세를 지속할 힘이 없어서 미군의 반격에 큰 손실을 입곤 했다.
이런 상황을 반영해서, 1951년 7월에 유엔군과 공산군 사이에 휴전 회담이 열렸다. 그러나 휴전 조건에 관해서는 합의가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았다. 공산군은 싸움터에서 얻지 못한 것들을 휴전 협상에서 얻으려 했다. 그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조건들을 내걸고 합의한 사항들을 재해석해서, 유엔군의 양보를 얻으려 했다.
게다가 휴전 협상 기간에 나온 소규모 전투들은 공산군이 바라는 전쟁 형태였다. 휴전 협상을 깨뜨리지 않으려고 양측은 대규모 작전을 피하고 전선을 정리하는 작전들을 수행했다. 자연히, 중요한 고지들을 차지하려는 싸움들이 벌어졌는데, 이런 싸움은 인명 손실이 컸다. ‘피의 능선(Blood Ridge)’, ‘단장의 능선(Heartbreak Ridge)’, ‘저격능선(Sniper Ridge)’, ‘불모고지(Old Baldy)’와 같은 슬픈 이름들은 ‘전선을 정리하는’ 소규모 전투들에서 나왔다.
인명을 경시하는 공산군은 인명 손실에 민감한 미군이 지치기를 기다렸다. 실제로, 미군 사상자들의 60%가 이런 제한전에서 나왔다. 중국이 휴전 회담을 지연시키자, 미국은 맥아더가 추천한 대안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제야 공산군도 진지하게 협상에 임했다. 마침내 1953년 여름이 되자, 휴전의 기운이 무르익었다. 남은 쟁점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포로 송환 문제였다.
거제도 포로수용소
공산군 포로들은 처음엔 여러 수용소들에 분산되었다. 그러나 섬이라 관리가 쉬운 거제도에 수용소가 서자, 모두 그곳으로 이송되었다. 북한군 포로 15만명과 중공군 포로 2만명이었다.
전선에서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는 상황에서 이처럼 많은 적군 포로들을 관리하는 것은 큰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결정적 문제는 수용동들을 서로 가까이 지은 것이었다. 포로들은 철조망 너머로 자유롭게 정보를 전달할 수 있어서, 수용소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비무장 군사 집단이 되었다.
북한군 포로들은 북한군처럼 조직되었고, 수용동마다 북한 깃발이 내걸렸다. 포로들은 병원 구역을 중계소로 삼아 휴전 회담 북한 대표 남일 중장의 지시를 받아 움직였다.
북한에 충성하는 친공 포로들은 다수 수용동들을 장악하고서 ‘의용군’으로 징집된 남한 출신 반공 포로들을 박해했다. 날마다 많은 반공 포로들이 인민재판을 받아 처형되었다. 이런 행태에 유엔군 당국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수용소 당국은 유화적 태도를 유지했다.
휴전 회담에서 유엔군 측은 포로들의 송환에 앞서 그들의 의사를 물어 송환 여부를 결정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북한군과 중공군 대표들은 무조건 송환을 주장했다. 이 문제로 휴전 회담이 교착되자, 영국은 인도를 통해 ‘본국 송환을 거부하는 포로들은 제3국으로 보내 관리한다’는 타협안을 내놓았다.
1952년 2월부터 유엔군은 본국 송환에 대한 공산군 포로들의 뜻을 확인하는 절차를 시작했다. 그러자 대한민국에 남겠다는 북한군 포로들과 대만으로 가겠다는 중공군 포로들이 예상보다 많다는 것이 드러났다. 17만가량 되는 포로들 가운데, 북한이나 중공으로 돌아가겠다고 밝힌 포로들은 7만뿐이었다. 당황한 북한과 중국은 심사 절차를 거부했고, 친공 포로들은 자신들이 장악한 수용동들에 심사를 위해 수용소 당국자들이 들어오는 것을 막았다.
수용소장 프랜시스 도드 준장은 대화로 갈등을 누그러뜨릴 수 있다고 생각하고서 친공 포로들과 자주 만났다. 친공 포로들은 그런 순진한 행태를 이용할 계획을 세웠다. 1952년 5월 7일 도드가 포로들을 만나러 오자, 친공 포로들은 그를 유인해서 납치했다.
이어 벌어진 포로들과 수용소 당국 사이의 협상에서 친공 포로들은 휴전 회담에서 ‘심사에 따른 송환 방식’을 흠집 내는 데 주력했다. 미군 장교로 하여금 “나는 포로들이 앞으로 인간적 대우를 받을 수 있다고 약속할 수 있다”고 답신에 쓰도록 유도하고, 판문점 회담에서 북한군 대표는 그 구절을 포로들이 비인간적 대우를 받아온 증거라고 주장했다.
밴플리트 장군은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판단하고서 먼저 새로운 수용동들을 건설했다. 친공 포로들이 이주를 거부하자, 병력을 투입했다. 포로들은 칼과 창을 들고 저항했지만, 전차까지 동원한 유엔군 병력에 진압되었다. 이 과정에서 묶여 있던 상당수의 반공 포로들이 구출되었다.
결국 3만6000명가량 되는 반공 포로들이 본토로 이송되어 8개 수용소에 수용되었다. 이들보다 앞서 민간인들로 판정된 3만8000명은 한국 정부에 인계되었다. 중공군 포로들은 제주도로 이송되었는데, 친공 포로 5911명은 제주시에 수용되고 반공 포로 1만4298명은 모슬포에 수용되었다. 거제도엔 7만 남짓한 북한군 친공 포로들만 남았다.
반공포로 석방
휴전의 기운이 익어가자,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에 동의하는 데 필요한 조건들을 밝혔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한국의 안전을 보장할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이었다.
그는 방송을 통해 “최악의 경우 단독 북진할 것이니 한국 국민과 육·해·공군은 정부 명령을 따르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전국에 ‘특별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이 대통령은 힘이 부친 적군에게 다시 힘을 기를 기회를 줄 수 없다는 등의 이유로 휴전에 줄기차게 반대했다. 그의 호소에 호응해서, 전국적으로 지지 성명과 시위가 나왔다.
이 사이에 이 대통령은 헌병총사령관 원용덕 소장에게 반공포로 석방 작전을 준비시켰다. 원 사령관은 내무장관과 협의하여 탈출한 포로들을 숨기고 보호할 방도를 마련했다. 작전은 1953년 6월 18일 새벽 2시에 개시되었다. 단전이 된 수용소들에서 철조망이 뚫리고 포로들이 일제히 탈출했다. 기다리던 경찰이 그들을 멀리 도피시켰고 민가들은 그들을 반갑게 맞아 숨겼다.
수용소 탈출은 대체로 순조로웠으나, 경북 영천의 수용소에선 문제가 생겼다. 한국 경비대장이 미군 수용소장에게 거사 계획을 밝히고 선처를 부탁한 것이었다. 미군 소장은 즉각 비상령을 내리고 장갑차들을 배치했다.
날이 밝은 뒤, 대구 육군 헌병사령관 앞에서 서울 사령부에서 내려온 장교가 보자기를 풀었다. 긴 칼이 들어 있었다. “이것은 대통령 각하의 선물입니다. 영천 포로들을 석방시키지 못하면, 우리 이 칼로 자결합시다.” 사령관은 곧바로 영천 경비대장을 불러 그 칼을 보였다.
그날 밤 9시에 약속대로 단전이 되자, 영천 경비대장은 철조망 절단 명령을 내렸다. 경비대원들은 미군 헌병들에게 달려들어 수갑을 채운 뒤, 철조망을 끊었다. 장갑차 공격조는 일제 사격으로 장갑차 전조등을 깨뜨리고 장갑차에 올라 준비한 고춧가루를 미군 승무원들에게 퍼부었다. 그 사이 막사에 잠입했던 요원들이 포로들을 이끌고 철조망을 벗어났다. 다행히, 거사를 막았던 미군 수용소장은 “이것은 정치 문제”라면서 추격하려는 부하들을 말렸다.
이렇게 해서, 3만5698명의 반공 포로들 가운데 2만7388명이 풀려났다. 이들은 대부분 북한군에 징집된 남한 출신 장정들이었다.
이 대통령은 “내가 책임을 지고 반공 한인 포로를 오늘 6월 18일로 석방하라고 명령하였다”고 발표했다. 이 소식에 온 세계가 경악했다. 모두 그를 성토했다. 미국은 특히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휴전 회담에서 곤혹스러운 처지가 되었고 미군 포로들의 귀환도 어렵게 된 것이었다.
이 대통령은 태연했다. 그는 단숨에 대한민국 국민들인 반공 포로들을 고국에서 추방되거나 북한으로 끌려갈 위험에서 구한 것이었다. 아울러, 자신이 반대해온 휴전 협상을 탈선시키는 데 성공한 것이었다.
전쟁 당시 국군 포로 6만5000명… 포병장교 조창호, 1994년 北 극적 탈출
1951년에 포로 교환 협상이 시작되었을 때, 유엔군 사령부는 8만8000명의 한국군이 실종되었다고 추산했다. 그러나 공산군은 7712명의 한국군만을 억류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유엔군은 이내 반박했다. 북한군과 중공군이 이전에 스스로 발표한 한국군 포로 숫자들을 집계하면 6만5000명에 이른다고. 결국 8726명의 한국군 포로들이 귀환했다.
1994년 10월에 조창호 소위가 국군 포로들 가운데 처음으로 북한을 탈출했다. 6·25전쟁이 일어났을 때, 그는 연세대학교 1학년생이었다. 그는 자원 입대해서 포병 장교로 복무하다 중공군의 포로가 되었다. 그는 탈출을 시도하다 붙잡혀 감옥에 갇혔는데, 당시 4명의 한국군 장교들이 함께 수감되었다. 그들은 모두 영양실조로 병사했다.
조창호 소위의 증언으로, 아직도 북한에 한국군 포로들이 많이 있으며 그들의 처지가 비참하다는 것이 알려졌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이들의 송환을 위해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특히 2000년에 비전향 장기수 공산주의자 63명을 북한으로 돌려보내면서도, 한국 정부는 북한에 한국군 포로들의 석방을 요구하지 않았다.
1994년 11월 조창호 소위는 중위로 진급하고 육군사관학교에서 전역식을 가졌다. 그의 복무 기간은 44년 3개월이었다. 2006년 그가 서거하자, 한국 정부는 장례식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래서 재향군인회가 나서서 ‘향군장’으로 치렀다. 국군장도 육군장도 아니고 향군장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갈리폴리 전역에 참가했던 마지막 노병이 죽었을 때, 호주 전역엔 반기가 내걸리고 중국을 방문한 수상은 노병의 국장을 위해 일정을 중단하고 급히 귀국했다.
2017년엔 이대용 장군이 서거했다. 그는 6·25전쟁에서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했던 ‘춘천 싸움’에서 6사단 7연대의 선임 중대장으로 공을 세웠다. 국군이 북진했을 때는 압록강에 맨 먼저 닿아서 압록강 물을 수통에 담아 이 대통령에게 바쳤다. 1975년 4월 자유 베트남이 공산 베트남에 멸망하자, 주베트남 공사였던 그는 교민을 보호하기 위해 사이공에 남았다. 미국 대사관을 떠나는 마지막 헬리콥터에 오르라는 미국 외교관의 제의를 마다하고, 그는 남아서 교민들을 외국 공관들로 대피시켰다.
그 자신은 포로수용소에 갇혔다. 외교관의 지위를 인정해 달라는 그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는 생존이 어려운 환경에서 날마다 고문을 받았다. 전향해서 북한으로 가라는 얘기였다. 주베트남 대사관의 부책임자였고 6·25전쟁의 영웅인 그는 선전 가치가 큰 인물이었다. 그는 그 시련을 끝내 견디고서 1980년 귀국했다.
이 장군의 장례는 가족장이었다. 심지어 신문에 부고도 제대로 나지 않았다. 우리는 늘 진정한 영웅들을 그렇게 보낸다.
향군장이면 어떻고 가족장이면 어떠랴. 그들은 괘념치 않으리라. 그들은 스스로 얻은 영예가 있으므로. 중세 서양 시인이 노래한 대로, 영예는 삭지 않으므로.
가축들은 죽고,
친척들은 죽고,
자신 또한 죽어야 한다;
그러나 영예는 결코 죽지 않는다,
그것을 얻을 수 있었던 사람에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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