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항상 불타오르게 하라 [장석주의 영감과 섬광]
양배추가 자라는 너른 서쪽 밭에도, 단풍 든 숲의 나무들에도, 나를 절반만 사랑하고 떠난 여자의 좁은 어깨에도 가을의 비가 내린다. 가을의 비는 투명 비커에서 양파가 흰 뿌리를 내리듯이 고요하다. 간혹 비는 구름이 품은 도토리 알들이 소쿠리에 쏟아지듯 소리를 내며 떨어지기도 한다. 의자들은 네 다리로 바닥 위에 서 있고, 나는 그 의자에서 책을 읽는다. 지금 병상에 창백한 이마를 드러낸 채 누워 저 비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사람도 있겠다. 가을의 빗소리에서 서늘함을 느끼는 까닭은 가을이 가고 있다는 징후 때문이었을까.
가을의 비가 내릴 때…
팔에 오소소 소름이 돋아 옷장에서 몸에 걸칠 카디건을 꺼내 거실에 나왔더니 처음 보는 낯선 이가 우두커니 서 있다. 나는 놀라서 묻는다. 당신은 천사인가요? 아니요, 나는 천사가 아닙니다. 나는 당신의 그림자일 뿐입니다. 그 환영은 돌연 사라졌다. 새벽에 밥을 짓는 어머니의 자식으로 나는 자라났다. 밤을 새우며 무언가를 끼적이는 자식의 몸이 상할까 봐 어머니는 걱정했다. 그 어머니는 이미 10여 년 전에 돌아가셨다.
어머니, 하고 입술을 달싹이며 나지막이 부르는 소리에 어머니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다. 한 번 돌이킬 수 없는 것은 영원히 돌이킬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탄생과 죽음, 우연의 불가피함들. 온갖 불행과 재난을 회피하고 살아남은 자에게 밀물처럼 밀려드는 안도와 슬픔들.
조카 애가 청첩장을 갖고 찾아왔을 때 나는 놀랐다. 내 아련한 기억 속에서 조카 애는 늘 어린애다. 그런데 결혼이라니! 하지만 남동생의 딸은 서른이 넘은 중학교 교사다. 그 애가 태어났을 때 남동생의 부탁으로 이름을 지었다. 이제 숙녀로 자라나 결혼을 앞둔 조카 애는 내가 작명한 이름을 늘 자랑스럽게 여겼다고 한다. 질경이 풀보다 더 하찮은 내가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이름 하나를 지어줬구나.
끼니때가 지났나? 갑자기 출출해진다. 잔치국수를 만들어 먹으려고 서둘러 찬장과 냉장고를 뒤져 굵은 멸치 한 줌과 다시마 한 조각, 대파, 양파, 다진 마늘을 준비해 육수를 끓인다. 소면 한 줌을 끓여 육수가 그득히 담긴 대접에 넣는다. 그다음 계란 지단과 채 썰어 프라이팬에 기름을 약간 둘러 볶은 애호박을 고명으로 얹고 양념장을 넣는다. 잔치국수 만드는 것쯤은 어렵지 않다. 반찬은 아삭아삭 씹히는 총각김치 한 보시기로도 충분하다. 잔치국수 한 그릇을 다 비우자 금세 배가 불러온다.
사춘기 때 한 소녀를 사랑했으나 나는 비겁했다. 그러니 끝내 입 밖으로 발설하지 못한 내향인의 짝사랑이었다. 아버지와는 늘 서늘했다. 나는 아버지의 무능력에 분노하고 엇나갔다. 에밀 시오랑의 책을 좋아한다는, 신축 아파트 현장에서 건축 자재를 지고 비계를 오르내리는 노동자 청년을 한동안 따라다녔다.
학교에 부적응한 것은 내가 평범한 사물들처럼 미덕과 인내심을 기르는 데 실패한 탓이다. 정규 교육과정에서 이탈해 시립도서관과 음악감상실 등지에서 청소년기를 보냈다. 스무 살이 돼 장병 신체검사를 받았으나 체중 미달로 군 입대마저 무산됐다. 그 작은 실패에도 낙담하고 쓸쓸해졌는데, 그건 내가 진심으로 군대 취사장에서 밥 짓는 일을 해도 좋겠다는 생각을 품었었기 때문이다.
모름은 존재의 기본값이다
“내가 목말라 한다고 바다를 가져오지는 말라.” (노르웨이 시인 올라브 H 하우게의 시구) 지상의 바람들은 한 점의 물방울들이 실어 나르고, 그 물방울에도 한 톨의 소금 성분이 섞였을지도 모른다. 뭔가를 사랑한다면 그걸 오래 바라봐야 한다. 관습의 눈으로는 말고 낯선 시선으로! 나는 바쁘다는 핑계로 뭔가를 오래 응시하지 못했다. 갈망하는 그 무엇도 가질 수가 없었고, 가야 할 곳에 가지 못한 채로 살았던 나는 가끔 혼자 흐느끼곤 했다. 내 나이 스물다섯 살일 때 나는 이미 한없이 무력했다. 나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은 환영인 듯 저 멀리에서 아른거렸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가을의 비 말고도 많다. 날 저물 무렵 골목에서 어머니가 아이를 부르는 목소리, 백지의 침묵, 파리나무십자가소년합창단이 부르는 성가, 풀밭에 뒹구는 모과들의 무심함, 강가에 흩어진 돌들, 야생 염소의 울음소리, 새의 꽁지깃, 기지개를 켜며 하품하는 고양이, 비눗갑 안에서 비누가 마르는 걸 좋아한다는 것도 나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나는 모르는 것들 속에서 그 모름을 외면한 채 살아왔다. 모른다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종종 자신에게 질문을 던진다. 모름은 존재의 기본값이다. 모름은 내 모든 앎과 삶에 반향하며 내 안에서 울려 퍼지는 메아리다. 그건 우리가 항상 삶에 대해 겸손해져야 할 의무를 환기시킨다.
양지만 딛고 산 사람은 모르지
어쩌면 해가 뜨고 진다는 단순한 앎 말고 그 밖의 것은 잉여일지도 모른다. 모름이 삶을 그르친 원인의 전부는 아닐 테지만 나는 어리석었다. 내 삶을 파괴한 크고 작은 실패의 흔적들을 되짚어보니, 후회와 회한이 밀려와 새록새록 뼈에 사무친다. 온전한 인간이 되려면 백일몽과 노스탤지어만으로는 부족하다. 나는 매사에 더 처절했어야 한다. 더 뜨겁게 사랑하고, 더 차갑게 불의에 맞서야 했다. 내가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없을 때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을 거부하며 더 꿋꿋했어야 한다.
앙상한 나무와 헐벗은 대지를 휩쓰는 한밤중의 북풍에 귀를 기울이며 온몸을 떨어봤어야 한다. 자연사박물관에서 멸종한 생물들의 이름을 헤아려 보고, 월러스 스티븐스의 시 ‘검은 새를 바라보는 13가지 방법’을 외우며, 체온이 식은 죽은 자의 머리맡에서 하룻밤을 새운 적도 있어야 한다. 늘 그늘을 피해 양지만 딛고 산 사람은 인생의 진실을 절반만 알 수 있을 뿐이다. 온전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라면 아, 나를 “비명 지르게 하라, 불타오르게 하라.” (레슬리 제이미슨의 책 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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