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혹독한 검열 속 언론인의 자존심 지켰다

김진형 2023. 11. 1.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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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벽사는 지난 9년 동안 폭풍우와 싸우며 험난한 지옥을 수없이 넘어왔다.

3·1 운동 직후, 천도교 청년회가 설립한 개벽사는 일제강점기 잡지언론의 본산이자 민족문화운동의 구심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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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오 차상찬 현대어로 읽기] 2. 개벽사 창간 9주년을 맞으며
오늘 잡지의 날 맞아 차상찬 재조명
‘개벽’ 폐간에도 잡지 발행으로 저항
▲ 차상찬 선생이 1929년 8월 별건곤 4권 5호 권두언으로 쓴 ‘창간 9주년을 마즈며’

개벽사는 지난 9년 동안 폭풍우와 싸우며 험난한 지옥을 수없이 넘어왔다. 그러한 중에도 우리는 개벽 운동을 충실히 도모하는 데에 잠시도 게으르지 않았다. ‘어린이’, ‘신여성’, ‘별건곤’, ‘학생’을 계속 발행한 것이 그것이요, 출판물 간행이 그것이요, 13도 조선문화기본조사운동이 그것이요, 사우제의 확충이 또한 그것이었다. 그리하여 오늘 개벽사 출판물의 총 독자는 수십만 명에 이르고, 발표된 글들은 해외 각지에 까지 퍼지게 되었다. 스스로 이 수많은 동지와 후원의 든든한 힘을 믿게 된 것이 기쁘다.

그러나 이 슬프고 기쁘고 한 회고가 어우러져서 9주년을 맞이하는 날, 천하 독자와 함께 섭섭한 생각을 같이 하게 되었다. 그것은 지난 1926년 8월 ‘개벽’이 강제 폐간당하여 우리 운동의 한 팔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우리의 가슴에 용솟음치는 감회라도 시원히 이야기할 자유가 없어졌다.

더 쓸 말이 없다. 지나간 일을 말하는 것은 오직 앞길을 가다듬자는 것이다.

‘개벽’ 대신에 창간을 추진하고 있는 ‘혜성(慧星)’ 잡지가 새로이 활약할 날이 가까운 앞날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잡지 간행의 자매 사업으로 새로이 계획하는 것이 또 한 가지 있다. 새로운 진용으로 천하 동지와 함께 더욱 용맹하게 싸워 나감으로써, 창사 10년부터는 새로운 기록을 세울 것을 스스로 맹세할 뿐이다.

‘별건곤’ 4권 5호(1929년 8월)

≫ 잡지의 날(11월 1일)을 맞아 차상찬이 개벽사 창립 9주년을 맞아 ‘별건곤’에 쓴 권두언을 소개한다. 3·1 운동 직후, 천도교 청년회가 설립한 개벽사는 일제강점기 잡지언론의 본산이자 민족문화운동의 구심점이었다. 짧은 글 행간에 일제의 언론 탄압에 대한 비판과 강한 저항 의지가 함축돼 있다. 앞부분 18행이 삭제된 것은 당시 검열이 얼마나 엄혹했는지 잘 보여준다.

차상찬은 숱한 어려움 속에서도 ‘어린이’, ‘신여성’, ‘별건곤’, ‘학생’ 등 각종 잡지를 발행하고, ‘조선부락조사’ 등 일제가 벌인 각종 조사에 대항해 추진한 ‘조선문화의 기본조사’, 사우제(社友制)라는 개벽사 고유의 제도를 통한 독자와의 긴밀한 연대감 및 유통망 구축 등을 개벽사의 성과로 평가했다. 또 ‘혜성(慧星)’ 창간을 예고하며, 계속 싸울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1926년 8월 ‘개벽’이 72호로 강제 폐간당한 후, 개벽사는 ‘혜성’ 창간을 추진했으나, 총독부 허가까지 4년 넘는 긴 시간이 걸렸다. 1931년 3월 창간된 ‘혜성’은 혹독한 검열에 시달리다가, 1932년 5월 ‘제일선’으로 바뀌었으나, 1933년 3월 갑자기 종간됐다. 차상찬은 이듬해 11월 ‘개벽’을 속간했지만 1935년 4월 제4호를 끝으로 개벽사는 문 닫고 말았다. 차상찬은 ‘개벽’ 발간을 주도하고, 강제 폐간 이후에도 ‘개벽’의 정신을 이어 가고자 악전고투한 일제강점기 최고의 잡지 언론인이다.

정현숙 강원문화교육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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