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나가 아닌 이웃과 얽혀가며 사는 이야기 담고 싶었어요”

김용출 2023. 10. 31. 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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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소설집 ‘이달의 이웃비’ 펴낸 박지영
2010년 등단작인 ‘청소기로 지구를∼’부터
김유정·현대문학상 동시 수상 ‘쿠쿠∼’까지
10년의 시간 가로지르는 단편 8편 엮어
고독한 사람들 나름대로 맺은 관계 그려
“글 쓸 때 옳은 소리하는 착한 이웃 된다면
생활감 있는 얘기들 천천히 오래 쓰고파”

작고하기 3년 전부터 아빠는 타인의 말을 들어도 이해하지 못했고 자신의 말 역시 거의 하지 못하는 상태가 됐다. 이때 아빠에게 남은 말은 단 두 가지. ‘고맙습니다’와 ‘씨발’이었다. 고맙습니다마저 잊어버리자 마지막까지 남은 말은 씨발뿐이었다.

아빠는 평소 욕을 하시는 분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씨발, 이라는 말은 마지막까지 남았다. 엘리베이터나 병원 대기실처럼 불편할 때마다 그 말을 뱉었다. 마치 틱처럼. 도대체 왜 끝까지 남는 말은 씨발이었을까.
소설가 박지영이 김유정문학상과 현대문학상을 동시에 수상한 ‘쿠쿠, 나의 반려밥솥에게’를 포함한 8편의 단편을 엮은 소설집을 펴냈다. 그는 “제가 어떤 무언가가 될 수 있는 최선의 이름은 바로 이웃인 것 같다”고 말했다. 이재문 기자
2013년, 아빠가 경도 인지장애 진단을 받았고 곧이어 치매 진단을 받았다. 치매는 언어장애로부터 왔다. 소설가 박지영은 돌봄의 주체로 아빠가 말을 잃어 가는 과정을 옆에서 찬찬히 지켜봤다.

치매에 걸린 아빠의 돌봄만 하고, 그 외 시간은 전부 오락이나 즐거움을 위해서 사용한다고 생각했다. 지금 스스로 무용한 존재인데 단지 아빠를 돌보는 것만이 가장 보람된 일을 하는 것이라고. 만약 글을 쓰면서 아빠를 돌본다면 부정적인 감정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아빠의 치매는 꾸준히 악화했다. 식사도 혼자 하지 못했고, 화장실도 혼자 가지 못했다. 팬데믹(감염병 세계적 대유행) 시기에는 더욱 악화했다. 밖에 나가지 못하면서 생활 루틴도 확 바뀌었다. 2020년 6월, 아빠는 결국 쓰러져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아빠의 치매와 자신의 돌봄 노동에 대해 쓰고 싶었지만 자신과 작품이 감정적으로 너무 가까워 발표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2021년 잡지 ‘릿터’에 단편소설 ‘쿠쿠, 나의 반려밥솥에게’를 발표했다. 아빠는 이듬해 4월 먼 곳으로 떠났다.

“가장 절박한 이야기를 해 보자고 생각해 썼던 것이었습니다. 치매에 걸린 아빠를 돌볼 때 주로 밥솥이 있는 식탁에서 생활했지요. 비록 아빠가 말씀도 못 하시고 감정 표현도 못 하셨지만 굉장히 기뻐하시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단편 ‘쿠쿠, 나의 반려밥솥에게’는 치매에 걸린 아버지 강만석의 간병인을 자처한 선동의 좌충우돌 돌봄 노동기다. 씨발과 염병 같은 말은 맥락에 맞게 찰지고 너무 애쓰지 말라는 아버지의 말 역시 랩처럼 메아리친다.

삼 남매의 막내 선동은 치매 아버지의 돌봄 대가로 형과 누나에게 금전적 보상을 요구한다. 하지만 당초 기대와 달리 최소 비용만을 받게 된 선동은, 치매 걸린 아버지의 일상을 영상화해 인기 유튜버가 되려는 꿈을 꾼다. 어릴 적 친구 제영무의 유튜브를 보면서 자극을 받게 되면서 선동의 폭주가 시작된다.

“강선동은 한 번도 싸운 적이 없었다. 자신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남을 위해서도 그랬다.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착했다. 서른아홉이 되어서야 강선동은 자신과 남을 돌보기 위해서는 다른 방식의 착함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착함은 양보가 아니었다. 희생이 아니었다. 투쟁하고 악착같이 싸우고 탐욕스레 지켜야 하는 것이었다. 하루 세 끼 성실하게 꼭꼭 씹어 든든하게 먹고 근력운동을 하고 체력을 키우며 사라지지 않도록 버텨 내야 하는 것이었다.”

소설가 박지영이 등단작 ‘청소기로 지구를 구하는 법’부터 김유정문학상과 현대문학상을 동시에 수상한 ‘쿠쿠, 나의 반려밥솥에게’까지 8편의 단편을 엮은 첫 소설집 ‘이달의 이웃비’(민음사)를 펴냈다. 작가는 10여년의 시간을 가로지르는 작품들에서 어지러운 세상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고독한 사람들이 맺는 관계를 들여다본다.

박 작가는 왜 작품에서 아무나가 아닌 이웃이 되기 위해 필수 지출 비용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일까. 그의 작가적 여로는 어디로 가고 있을까. 박 작가를 지난 20일 서울 용산 세계일보 사옥에서 만났다.

―선동이 나중에 쿠쿠 밥솥의 말을 배우게 되는데.

“아버지 만석이 아들 선동의 반려밥솥 역할을 했다. 하지만 만석이 이제는 없기 때문에 선동 스스로 자기의 밥솥이 돼 자신을 조기 치매로 설정해 놓고 유튜브를 더 지속해 보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보온을 시작합니다, 는 쿠쿠 밥솥의 소리를 듣고서 책에 써야 되겠다고 생각했던 그 지점과 조금은 멀어져 있는 장면이기는 하다.”

―염병이라는 욕설이 잘, 찰지게 사용된다. 실생활에서 염병이라는 말을 자주 하는지.

“(염병이라는 말을) 자주 하진 않는다(웃음). 아무래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과 연결시켜서 하려다 보니까 염병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씨발이라는 말과 팬데믹 상황에서 염병이라는 말을 엮어서 이야기를 풀어 보려고 했다. 불편한 이야기지만 약간 톤을 띄워서 코믹하게 다루기 위해서였다.”

표제작 ‘이달의 이웃비’는 정신장애가 있던 형을 잃은 전직 공무원 동석의 이야기다. 동석은 당근마켓에서 주기적으로 이웃들과 거래하는 병식을 만난다. 경찰 공시생으로 ‘배 순경’으로 불리는 병식은 필요치 않은 물건을 구매하고 거리를 청소하고 실종된 이들을 찾아다니기도 한다. 이웃으로 남기 위해서 지불하는 일종의 ‘이웃비’인 셈이다. 동석은 병식과 함께 사라진 이웃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하다가 어느 날 사건을 목도하게 되는데.

―작품은 어떤 계기로 쓰게 됐는지.

“조현병이나 경계성 지적 장애를 앓는 사람과 함께 사는 이야기를 해 보고 싶었다. 예전에 밤에 일할 때 새벽 첫 지하철을 타고 돌아오는데, 연세가 지긋한 아버지가 40대 정도 되는 아들을 데리고 손을 잡고 산책하다가 쓰레기를 줍는 장면을 봤다. 어떤 사연이 있을까. 마음에 남아서 언젠가 써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등단작 ‘청소기로 지구를 구하는 법’은 고객들의 집을 방문해 청소기를 고쳐 주는 수리 기사의 이야기다. 잘못 사용된 청소기에서 잃어버린 물건을 가져오는 남자는 쓸모없는 것들로 가장 쓸모 있는 것을 만드는 큰 꿈을 꾼다. 몽환적인 것이 오히려 매력적.

―작품이 약간 몽환적인 분위기 같다.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 쓴 작품이라서 그럴 것이다. 이것이 소설이 맞나, 하는 생각을 많이 하면서 썼다. 보잘것없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 가치를 부여하는 이야기를 해 보고 싶었다.”

그는 ‘작가의 말’에서 “여전히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면 마이쭈나 초코파이, 그와 유사한 작고 다정한 것들을 건네고 나눠 먹는 것으로밖에 마음을 표현하는 법을 모른다. 그래서 내 소설의 인물들은 자꾸만 별것도 아닌 것을 건네주고 건네받곤 하는 모양”이라고 말했다.

1974년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란 박지영은 2010년 ‘청소기로 지구를 구하는 법’으로 조선일보 신춘문예를 통해서 등단했다. 이후 장편소설 ‘지나치게 사적인 그의 월요일’, ‘고독사 워크숍’ 등을 펴냈다. 김유정문학상, 현대문학상 우수상 등을 수상했다.

―작가 또는 작품에 대한 꿈이나 비전은.

“어렵다. 작품 속 동석이 ‘난 글을 쓸 때만 착해지는 거 아닌가’하고 고민하는데, 저도 그런 고민이 많다. 글을 쓸 때만 옳은 소리 하고 착한 척한다는. 제가 글을 쓸 때만 착한 이웃이 된다고 생각을 하면, 글을 아주 오래 쓰고 많이 쓰면 그 시간 동안 좋은 이웃일 수 있겠구나, 라는 정도의 해답으로 나아가고 있는 과정인 것 같다. 꾸준히 생활감 있는 이야기들을 천천히 오래 쓰고 싶다.”

일할 때는 주말에만, 쉬고 있는 지금은 주로 낮 시간 카페에서 글을 쓴다. 글을 쓰고 돌아와선 저녁 무렵 집 주변 공원이나 거리를 산책한다. 그리하여, 박지영은 다시 내일의 글쓰기를 생각할 것이다. 무리하지 않고 쓰기 위해서 매일 글을 쓰고, 매일 글을 써서 무리하기 않기를. 별것 아닌 것 같은 성실한 쓰기야말로 별것인 작품이 된다는 것을 믿으며. 마이쭈와 초코파이, 한마디 인사와 짧은 미소처럼.

그는 인터뷰 도중 대답을 하려다가 잠깐 멈추고 생각을 하기도 했고, 대답이 엉긴 뒤에는 말이 정돈되지 못했다며 미안해하기도 했다. 시간을 갖고 기다려 주기만 하면 됐다. 얼마 뒤면 그는 어김없이 자신의 대답을 들려줬으니까. 너와 내가 다르지 않다는, 그러니까 이웃이 되겠다는 그 마음을.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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