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전투 실상 밝히는 게 동학농민혁명 연구 과제”
[짬][짬] 나주 사죄비 건립추진위 공동대표 이노우에 가쓰오 교수
일본의 노학자는 단상의 방향을 반대로 돌렸다. 그리고 ‘동학농민군 희생자를 기리는 사죄비’(사죄비) 비문을 읽었다. 사죄비엔 ‘나주에서 희생당한 동학농민군을 기리고자 일본 시민들이 먼저 사죄의 마음을 담은 성금을 자발적으로 모았다. 한국 시민과 나주시의 협력으로 비를 세우게 됐다’고 적혀 있었다. 동학농민군의 학살을 사죄하는 내용이 적힌 사죄비를 세운 것은 나주 학살 이후 128년 만이다.
나주 사죄비 건립추진위원회 일본 쪽 공동대표인 이노우에 가쓰오(78) 일본 홋카이도대학 명예교수는 지난 30일 전남 나주 나주역사공원에서 열린 사죄비 제막식에서 “동학농민군 희생자와 한국의 모든 분에게 일본인으로서 이 자리에 참여하고 있는 일본인 답사단 일행과 함께 마음으로부터 추도하고 사죄를 드린다”고 말했다. 한·일 두 나라 시민은 성금 3천만여원을 모았고, 나주시는 터를 제공했다. 사죄비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 학생의 여학생 희롱에 항의했던 옛 나주역사에서 100여m 떨어진 곳에 서 있다.
그는 이날 제막식 인사말에서 일본군 토벌대대의 서울 출군, 각지 토벌전투, 동학농민군의 강력한 전투, 일본군 작전의 장기화와 토벌지역의 확대, 일본군의 나주 입성과 장흥전투 등 동학농민군의 항전, 나주에서의 장기 주둔, 섬멸작전의 격화, 동학농민군 대량 처형이라는 역사를 간결하고 정확하게 설명했다.
이노우에 교수는 “비의 명칭이 사죄비로 바뀌었기 때문에 사죄를 전제로 역사적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전남의 일본군 토벌작전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는데, 후비보병 토벌작전 90일 중 35일간 나주에서 주둔했다”고 말했다.
이노우에 교수는 일본군이 동학농민혁명 때 조선으로 건너와 농민군들을 학살했다는 사실을 밝힌 학자다. 그는 1995년 홋카이도대학 문학부 인류학교실 표본 창고 책장 위에 놓여 있던 유골을 발견했다. 유골 안 메모지엔 ‘1906년 진도에서 수습한 동학당 수괴의 수급’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노우에 가쓰오 교수는 홋카이도대학에서 연구 중이던 박맹수 원광대 명예교수와 함께 일본방위연구소 소장 문서를 뒤져 동학농민군 토벌부대 일본군 후비보병 19대대 대대장 미나미 고시로(南小四郞)를 찾아냈다. 그는 “미나미 후손이 전화를 걸 때마다 고령이어서 집을 방문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다가, 대학 정년 며칠 전에 간신히 방문해도 좋다고 했다”고 회고했다.
미나미 대대장이 쓴 ‘동학당 정토(征討) 경력서’는 1895년에 작성된 것으로 일본군 명령의 발령, 부대의 이동, 사령부로부터의 전보 등의 내용을 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노우에 교수는 “‘동학당정토 경력서’를 처음 접했을 때 감동했다. 후손이 미나미라고 적힌 ‘군용 고리짝’을 내왔을 때의 장면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역사연구자로서 역할을 다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고 말했다.
30일 제막식 단상에서 사죄비 읽고
일본군의 농민군 학살 간명히 설명
“일본군의 대량 처형 사실 인정해야”
1895년 토벌군 기록 찾아 학살 밝혀
“전남 지역만 전투 상보 못 찾아
앞으로 전남 전투 검증 필요해”
이전까지 알려졌던 ‘동학당정토약기’가 미나미 대대장의 증언인 반면, ‘동학당정토경력서’는 미나미 대대장이 직접 작성한 실무적인 간결한 일지다. 이노우에 교수는 “부대의 이동과 나주로부터 내린 명령, 보고받은 내용 등 대대장으로서 공적인 기록이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다”며 “이 두 개의 자료를 합하면 역사적 사실을 새롭게 규명할 수 있다. 향후의 연구과제”라고 말했다.
일본군 토벌부대 후비보병 제19대대는 1895년 1월5일 나주에 들어와 2월8일까지 35일간 호남초토영(나주초등학교 자리)에 주둔했다. 일본군 토벌군은 1895년 1~2월 나주목으로 끌려온 접주 이상 지도자 783명 이상을 처형했다. 일본 대본영은 1894년 6월 동학농민군 봉기에 겁을 먹은 조선 왕실이 청에 요청해 청군을 불러들이자, 조선의 요청이 없었는데도 즉각 일본군대를 파병했다. 청일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일본은 ‘서양과 왜의 세력 따위를 물리치자’며 2차 봉기에 나섰던 동학농민군을 처절하게 학살했다. 역사학자들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 때 농민군 희생자 숫자를 3만~5만명으로 추정한다.
동학농민혁명 중 전남지역 전투의 실상이 규명되지 않은 점이 앞으로 동학 연구의 과제다. 이노우에 교수는 “미나미 대대장은 동학농민군 토벌전에서 총 27회의 전투가 있었다고 전투보고서를 제출했다”며 “그중 10회의 전투가 전남지역에서의 전투이고, 그중 5회가 장흥 전투”라고 말했다. 전남전투 이전과 이후 ‘전투상보’는 남아 있지만, 전라남도 지역 전투상보만 없다. 그가 “기록되지 않은 전남 지역 전투를 해명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는 이유다. “일본군은 청 여순(旅順) 공략을 준비하면서 일본군의 병참선을 여순으로 이전하려고 했는데 동학농민군 토벌전에서 고전하자 증원부대를 보냈다. 동아시아의 ‘커다란 국면’의 측면에서도 전남 지역 전투에 대한 검증이 필요하다.”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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