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라노-글로벌픽] 리 전 총리 별세 후폭풍 두려운 中 정부

이승륜 기자 2023. 10. 31.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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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7일 중국 리커창 전 국무원 총리의 별세 이후 반정부 시위를 우려하는 분위기가 고조하고 있습니다. 꽤 오랫동안 견제와 균형 없이 지속돼온 시진핑 정권의 ‘일방주의’ 정치에 염증을 느낀 시민사회와 학계가 리 전 총리 사망을 계기로 대규모 급진 운동에 나설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2021년 9월 30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연설하는 리 전 총리의 모습. 연합뉴스


중국의 정치는 표면적으로는 공산당 일당 독재처럼 보이지만, 1994년 덩샤오핑 사망 이후 절대 권력이 사라지고 집단지도체제가 들어서면서 파벌 간 치열한 각축을 통해 견제와 균형을 유지했습니다.

중국 내 대표적 정치 파벌은 과거 수십 년간 합종연횡을 거듭해온 상하이방과 공청단파입니다. 상하이방은 1989년 장쩌민이 자오쯔양의 후임으로 총서기가 된 후 권력 강화를 위해 상하이 당서기와 시장 등 지지 세력을 모아 1990년대 초 형성한 정치세력입니다. 상하이방 출신 인사들은 장쩌민이 덩샤오핑에게서 권력을 넘겨받은 후 정적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공을 세우며 20여 년간 당·정·군 기관의 요직을 장악하며 중국 정치를 주도했습니다.

상하이방 출신들은 후진타오가 장쩌민의 후계자로 낙점돼 총서기가 된 뒤에도 오랫동안 당·정·군을 장악했는데, 이런 이유로 후진타오는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는 데 한계가 있었죠. 이 과정에서 후진타오를 뒷받침하며 정치적 입지를 굳히기 시작한 세력이 바로 공청단(공산주의청년단)파입니다. 공청단파는 1920년 중국공산당이 상하이에서 청년 사상 교육을 위해 설립한 사회주의청년단을 기원으로 하는데요. 공청단에 가입하는 이들 상당수는 서민계층의 고학력자로, 빈부 격차 해소와 고소득층 억제, 사회 균형 발전 등의 사회개혁을 주장했습니다. 이들은 2012년까지 당 중앙위의 23%, 정치국의 32%를 차지할 정도로 세력이 커졌지만, 끊임 없이 상하이방의 견제를 받아야 했습니다. 이 때문에 후 주석은 국무원 총리인 원자바오와 권력을 나눠가진 데다가 은퇴한 장쩌민의 정치적 개입도 계속 받아야 했습니다.

이 같은 중국 내 파벌 간 견제와 균형의 움직임은 시진핑을 주축으로 한 5세대 지도부의 등장 이후 주춤했습니다. 정권을 잡기 전 시진핑은 중국 내 또 다른 정치 세력인 태자당의 일원으로 공청단 출신의 리커창 총리와 주석 자리를 놓고 경쟁을 벌였습니다. 당시 두 번 연속 공청단에 주석 자리를 내줄 수 없다고 여긴 상하이방이 태자당과 연합 전선을 펴면서 시진핑은 주석 자리에 오릅니다. 시 주석은 파벌의 도움으로 최고 자리에 올랐지만 반부패 정책을 명분으로 1인 장기 집권 체제를 강화하면서 주요 파벌 출신 인물을 대대적으로 숙청하고 측근을 대거 기용했습니다. 지난해 10월 공산당 20차 대회에서 후진타오 전 주석이 새롭게 선출된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명단에 공청단 계열 인물이 한 명도 없는 것에 항의하다가 자리에서 끌려나간 사건은 현대 중국 정치에서 파벌주의가 최종으로 막을 내린 사건으로 평가되죠.

정치·경제·사회 권력을 모두 차지한 시진핑 주석의 독식 체제는 2013년부터 현재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조금이나마 존재감을 과시하며 견제·균형자의 역할을 해온 이가 바로 리 전 총리입니다. 공청단을 배경으로 정치에 입문한 리 전 총리는 한때 ‘후-원(후진타오-원자바오)’ 조합에 버금가는 ‘시-리 조합’ 시대의 한 축을 맡을 것으로 기대를 모았습니다. 경제 분야 주도권을 쥔 총리로서 정부 주도 경제 성장 모델을 버리고 인위적 경제 부양 지양과 구조 개혁 등을 강조하는 ‘리코노믹스(리커창 경제정책)’를 추진했죠. 하지만 중국 경제 성장률이 둔화하고 증시가 붕괴하는 등 악재가 잇따르면서 점차 입지와 권한을 시 주석에게 내주고 지난 3월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나게 됩니다.

하지만, 리 전 총리가 세상을 떠나자 과거 그의 말과 행동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2020년 중국 지도부가 ‘빈곤이 사라졌다’고 선전하자 그는 “중국 인민 6억 명 이상이 한 달에 17만 원도 못 번다”고 말했으며, 지난해 8월 코로나19 창궐로 폐쇄주의가 계속되자 개혁·개방의 상징인 덩샤오핑 동상에 헌화하며 개혁 개방 의지를 다지기도 했습니다. 관련 글과 영상, 추모 메시지가 온·오프라인으로 이어지자 중국 당국은 리 전 총리의 장례 일정도 공개하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일각에서는 중국 내 SNS도 통제 대상이라는 이야기도 들립니다. 리 전 총리의 장례식을 기점으로 수년간 계속된 통제에 쌓인 시민의 울분이 한꺼번에 터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배경이죠. 앞서 1976년 저우언라이 총리 사망과 1989년 후야오방 총서기 사망 이후 대규모 시민운동이 촉발된 경험 탓에 중국 당국이 리 전 총리 추모 열기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는 소식도 있습니다.

그간 중국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하마스 간 전쟁 등 국제 문제에 있어서 중재자로 자리잡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면서 끊임 없이 미국을 겨냥해 일방주의 행태가 문제가 있다고 비난해왔죠. 하지만 중국은 그간 국제사회에서 ‘강한 중국’을 표방하며 대만 문제를 비롯한 각종 외교적 사안마다 독단적인 행태로 비판받아 왔습니다. 그런 중국이 국내 정치의 일방적 폐쇄주의로 인해 흔들리는 현실은 집권 3기를 맞은 시진핑 체제에 ‘적신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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