젤렌스키 측근 "우리는 선택의 여지 없어. 이길 수 없다" 토로
[이재호 기자(jh1128@pressian.com)]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 간 충돌로 우크라이나 사안이 서방의 관심에서 다소 멀어지고 있는 가운데, 우크라이나가 서방 지원 축소 뿐만 아니라 내부 부패, 전선 고착화 등으로 러시아와 전쟁에서 쉽지 않은 싸움을 하고 있다는 진단이 나왔다.
30일(현지시각)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지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지난 9월 미국을 방문한 이후 달라진 서방의 분위기를 실제 우크라이나가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를 방문해 젤렌스키를 포함한 측근들과 인터뷰를 가졌다고 보도했다.
이 인터뷰에서 젤렌스키 대통령은 "누구도 나만큼 우리가 이길 것이라는 걸 믿지 않는다"고 말했다고 매체는 전했다. 지난해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을 때만 해도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던 미국 등 서방이 전쟁 1년 반이 넘어가면서 지원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매체는 "지난해 말 젤렌스키 대통령이 워싱턴에 방문했을 때 미국은 그를 '영웅'이라며 환영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분위기가 바뀌었다"며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은 연방 예산을 둘러싼 논쟁에서 걸림돌이 되었다. 젤렌스키의 대외 정책 자문관 중 한 명은 그에게 방문을 취소하라고 했다"고 전했다.
실제 젤렌스키는 이번 방문동안 전쟁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었다고 느꼈다며 "가장 무서운 것은 우크라이나 전쟁에 세계가 익숙해져 있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전쟁으로 인한 피로감은 파도처럼 넘실거리고 있다"며 "(이 피로감을) 미국이나 유럽에서 볼 수 있다"고 전했다.
매체는 "우크라이나의 반격은 엄청난 손실 속에 치러졌고 젤렌스키는 승리가 다가왔다는 것을 (미국 등 서방의) 파트너들에게 확신시키기 더욱 어려워졌다"며 "이스라엘에서 전쟁이 시작되면서 우크라이나에 대한 세계의 관심을 지키는 것조차 주요한 도전과제가 되어 버렸다"고 현 상황을 진단했다.
매체는 키이우를 방문한 당일 젤렌스키 대통령의 측근에게 대통령 기분이 어떠냐고 물었더니 1초도 망설이지 않고 "화가 나 있다"고 말했다며 전쟁 초기의 낙관적이고 농담도 던졌던 젤렌스키 대통령의 모습이 전쟁 2년이 다가오면서 사라졌다고 전했다.
오랫동안 젤렌스키와 함께 했던 측근은 "요즘은 (젤렌스키 대통령이 전쟁 상황실에) 와서 새로운 정보를 얻고 명령을 내리고 밖으로 나간다"며 대통령이 서방 국가들에게 배신감을 느끼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런데 최근 전투에서의 배패에도 불구하고 젤렌스키 대통령은 전쟁을 포기하거나 평화를 추구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고 있다고 매체는 보도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의 최측근 중 한 명은 매체에 "그는 착각하고 있다. 우리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이길 수 없다"라고 속내를 털어놓기도 했다.
매체는 "일부 측근들은 젤렌스키의 고집이 새로운 전략, 새로운 메시지를 내놓으려는 팀의 노력을 저해하고 있다고 말한다"며 "그들이 전쟁의 미래에 대해 논의해 오면서, 러시아와 평화협정을 협상할 가능성에 대한 언급은 금기시되어 왔다"고 전했다. 이는 우크라이나 내부 여론 때문이라는 것이 매체의 분석이다.
젤렌스키는 일시적인 휴전에 대해서도 여전히 반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휴전에 대해 "이 상처를 후대에 열어두는 것을 의미한다. 아마도 그것은 우리나라 안팎의 몇몇 사람들을 진정시킬 수 있을 것이지만 여전히 폭발력이 있는 문제다"라며 "(휴전은) 단지 이 폭발을 지연시킬 뿐"이라는 입장을 내놨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에서는 전쟁의 장기화에 따른 부정적 여론도 조성되고 있다. 매체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기반시설을 공격하면서 발전소들과 전력망 일부에 피해를 입혔기 때문에, 기온이 내려가면 급증하는 수요를 감당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며 "이 문제를 다루는 고위 관리들 중 세 명은 올 겨울 정전 사태가 더욱 심각해질 것이며, 우크라이나 내의 대중들의 반응이, 그렇게 관대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매체에 따르면 이 관리들은 "지난해 (겨울) 사람들은 러시아인들을 비난했다"며 "이번에는 충분히 대비하지 않고 있는 우리를 비난할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우크라이나 동부를 비롯한 전장 상황도 우크라이나에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지 않은 실정이다. 매체는 추위가 군 진격을 어렵게 만들고 있고 봄 이후부터 최전선에 별다른 변동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고 보도했다.
매체에 따르면 젤렌스키의 측근 중 한 명은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며, 일부 전쟁의 일선에 있는 지휘관들이 대통령 집무실에 왔을 때 진격 명령을 거부하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이 측근은 "그들(일선 지휘관)은 참호에 앉아 방어선을 유지하고 싶어할 뿐"이라고 말했다.
일례로 이달 초 젤렌스키 대통령과 우크라이나 정부는 고를로프카를 되찾고 싶어했는데, 일선에서는 "남성도 무기도 없다. 무기는, 대포는 어디에 있고 어디서 병력을 충원해야 하냐"는 반응을 보였다고 매체는 전했다.
이어 "몇몇 군 조직에서는 인력 부족이 무기, 탄약의 부족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됐다"며 "젤렌스키의 가까운 보좌관 중 한 명은 미국과 동맹국이 무기를 준다고 해도 그것들을 사용할 사람들이 없다고 말했다"고 덧붙였다.
침공 초기에는 많은 우크라이나 남성들이 군대에 입대했지만 지금은 "수입이 있는 사람들은 때때로 병역 혜택을 위해 돈을 지불함으로써 퇴역하는 방법으로 뇌물을 주기도"하는 상황으로 바뀌었다는 것이 매체의 분석이다. 이 때문에 젤렌스키 대통령은 지난 8월 11일 국가 전역의 징병 사무소장들을 해고하기도 했다.
이는 부정부패와 싸우겠다는 그의 의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군 고위 장교에 따르면, 이로 인해 신병 모집이 거의 중단되다시피 하면서 역효과를 낳았다고 한다. 또 일부 징병 사무소의 평판에 문제가 생기면서 징병 업무를 맡을 사람이 없어진 것도 문제였다.
부정부패 문제는 젤렌스키와 많은 동맹국들 간 관계를 긴장시키기도 했다. 매체에 따르면 백악관은 그가 워싱턴에 방문하기에 앞서 부패 척결을 위한 개혁 목록을 준비했다고 전해졌다. 젤렌스키와 함께 미국에 방문한 한 측근은 이러한 제안은 매우 높은 고위직을 타깃으로 하고 있었다며 이는 "제안이 아니라 조건이었다"고 말했다.
미국의 우려를 해소하기 위해 젤렌스키 대통령은 자신의 측근인 올렉시 레즈니코프 국방장관을 해임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매체는 젤렌스키 대통령이 참모들에게 개인의 이익을 챙기지 말라고 했으나, 행정부 간부들은 업무에 대한 정밀한 조사가 진행되자 사기 저하를 호소하기도 했다고 보도했다.
매체는 "10월 초 대통령 직속 보좌관에게 부패와 전쟁에 대해 언급하자 그 보좌관은 녹음기를 꺼달라며,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마치 내일이 없는 것처럼 도둑질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며 우크라이나 내 부패 상황이 조속히 해결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전망했다.
이 보좌관은 "국방장관을 해고한 것에 대해 관료들이 공포를 느끼지 않았는데 실제 해임까지 너무 오래 걸렸기 때문"이라며 "대통령은 지난 2월 국방부 내부 부패가 만연해 있다는 경고를 받았지만, 6개월이 넘도록 말을 아꼈다"고 전했다.
매체는 또 젤렌스키 대통령의 경제와 에너지 정책 고문인 로스티슬라브 슈르마에게 우크라이나 남부 발전소 및 태양에너지 회사의 공동소유를 맡은 형제가 있다면서, 러시아가 이 지역을 점령해 우크라이나에 전력을 공급하지 못했음에도 그 회사들은 전기 생산에 대해 국가로부터 계속 대금을 받고 있었다는 우크라이나 탐사보도매체 <비후스>의 보도를 인용했다.
매체는 "우크라이나의 독립 기관인 반부패 경찰은 슈르마와 그의 형제에 대한 횡령 조사를 개시했지만 젤렌스키는 고문을 정직시키지 않았다"며 "대신 9월 말 슈르마는 워싱턴으로 가는 대통령 대표단에 합류했고 바이든 행정부의 고위 관리들을 만났다"고 보도해 젤렌스키 대통령의 부패 척결 의지에 대한 의구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재호 기자(jh1128@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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