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지 마" vs "입고 있어"  [어도락가(語道樂家)의 말구경]

2023. 10. 31.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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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세상 언어들의 이모저모를 맛보는 어도락가(語道樂家)가 말의 골목골목을 다니며 틈새를 이곳저곳 들춘다.

재미있을 법한 말맛을 독자들과 함께 나누며 숨겨진 의미도 음미한다.

이런 화용론적 차이가 얼마나 유의미한지는 좀 아리송하지만 언어 현상은 딱 부러지게 설명이 안 되는 것도 꽤 있다.

그러니까 원어민 말을 들으라는 소린가? 해당 언어에서 많이 쓰는 간결한 표현이 가장 자연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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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세상 언어들의 이모저모를 맛보는 어도락가(語道樂家)가 말의 골목골목을 다니며 틈새를 이곳저곳 들춘다. 재미있을 법한 말맛을 독자들과 함께 나누며 숨겨진 의미도 음미한다.
게티이미지뱅크

이제는 영어 교육 사업에도 진출한 미국 출신 방송인의 광고 가운데 ‘외투 벗지 마’를 ‘don't take your coat off’로 옮기면 한국식이고 ‘keep your coat on’이 미국식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영어도 부정 명령문은 얼마든지 쓰므로 앞의 표현이 딱히 틀린 것은 아니며, 한국어 역시 ‘외투 입고 있어라’도 되기에 사실 처음에는 고개를 갸우뚱거리기도 한다.

몇 가지 이유야 있다. 글자 그대로는 같더라도 언어마다 느낌이 똑같지는 않고 화용론(話用論)적으로도 조금씩 다르다. 영어에서 금지를 나타내는 부정 명령문은 좀 더 딱딱하며, 긍정 명령문이 간결하고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한다고 느껴지는 편이다. 다만 어느 언어든 상대가 옷을 벗으려는 데 막아야 하는 상황이라면 ‘벗지 마’가 더 어울릴 법하다. 이런 화용론적 차이가 얼마나 유의미한지는 좀 아리송하지만 언어 현상은 딱 부러지게 설명이 안 되는 것도 꽤 있다.

빈도로 보면 어쨌든 상대적으로 한국어는 ‘벗지 마’가, 영어는 ‘입고 있어’가 자주 나오는 편이다. 영화나 드라마도 ‘keep it on’을 ‘입고 있어’보다는 '벗지 마‘로 번역하는 자막이 많다. 여기에는 언어경제적 요인도 작용하는 듯싶다. 한국어, 스페인어 등은 ’벗지 마‘가 잦고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등은 ’입고 있어‘가 잦은데 각각 더 짧은 쪽을 쓰는 것이다.

한: 신발 벗지 마/신발 신고 있어

영: don't take your shoes off/keep your shoes on

독: zieh die Schuhe nicht aus/lass die Schuhe an

프: n'enlève pas tes chaussures/garde tes chaussures

스: no te quites los zapatos/déjate los zapatos puestos

‘벗다/신다’는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부정 명령문이 더 복잡하고 길다. 반면 한국어 및 스페인어 등은 오히려 긍정 명령문이 길어진다. 물론 모든 언어가 언제나 이렇다고 단정하긴 어렵지만 약간의 관계는 있어 보인다. 적어도 자막이나 더빙은 짧은 말을 선호하는 편이고, 일상 대화에서도 보통은 짧게 말하는 경향이 좀 더 크다.

‘아직 안 자?’도 영어는 대개 ‘are you still awake/up?’이다. 반대로 ‘아직 깨어 있니?’나 ‘are you not asleep/aren't you asleep yet?’도 틀린 표현은 아니지만 일반적인 상황에서 딱 쓰는 말은 아니며 일단 길다. 러시아어와 폴란드어도 한국어처럼 ‘아직 안 자?(ещё не спишь?/nie śpisz jeszcze?)’로 표현하는데 ‘깨어 있는’을 뜻하는 형용사(бодрствующий/rozbudzony)가 러시아어와 폴란드어답게 너무 길다.

그러니까 원어민 말을 들으라는 소린가? 해당 언어에서 많이 쓰는 간결한 표현이 가장 자연스럽다. 그렇게 표현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다. 그런데 외국어로 자연스러움만을 추구하는 게 실은 부자연스럽다. 틀린 말을 골라서 할 필요는 없으나 자연스러움에 너무 부자연스럽게 얽매이지는 않아야 바람직하다. 적당히 자연스러워지면 그만이다. 자신의 모어만큼 외국어를 구사한다면 최선이겠지만 누구나 최상의 상황에서 최고 수준의 외국어를 익힐 수는 없다. 우리가 한국어로 소통할 때도 말을 잘하는 것만 능사는 아니다. 상대와 어떻게 통하느냐가 중요하다. ‘원어민’의 주장은 골라서 들으면 된다. ‘외국어’를 써먹는 쪽은 그쪽이 아니라 이쪽이기 때문이다.

신견식 번역가·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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